세상사는 이야기

나의 착각

별꽃바람 2007. 10. 20. 15:51

오늘 도바세(www.dobase.net)의 출석부로 바람에실려님이 올린 글입니다.

어제 정모를 하시고 나서 여러 생각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없는 생각이 다 나신 것을 보면.^.^

 

 

나의 착각....아니면 모두의 착각?

여하튼 이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들은 福 많이 받으실 껍니다.

왜냐...........졸 나게 기니까.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편가리기’로 거부되는 시대에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 지...........

‘우리’는 단지 마음이 만드는 산물이다.

당신이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당신의 우리는 달라진다.

당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바로 당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양한 연구 심리학 자료를 통해 인간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사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이 세상마저도 마음이 만들어낸 주관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상황에 의거해 설명한다는 사실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인간 마음의 진리를 믿는 사람에게 당혹스러운 주장일 것이다.

우리 모두 국민성, 지역성, 남성-여성, 강남-강북 등의

미신적인 구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 스스로 인간에 대해 만들어가는 미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이념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세상에 대한 신념이

왜 미신에 불과한지를 알려주는 과학적 심리학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한 패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며,

또 우리의 상식과는 어떻게 다르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궁금한 사람,

아니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인간 부류 형성에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이다

인간은 본능처럼 무리를 짓고 집단을 형성해서 산다.

최소단위로서 가족이 있고,

학교와 직장, 지역사회, 국가 등 규모와 형태 면에서 다양하다.

이처럼 일정하게 정해진 집단 외에도 순간순간 인간 부류를 형성하곤 한다.

동호회, 유명 연애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팬클럽, 정치인 후원회, 산악회,

특정 자동차는 타는 사람들의 모임,

하물며 아침 출근길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 등.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 부류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언뜻 생각하기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부류는 어떤 순간에 깨질지 모르고,

어느 순간에 다른 부류로 돌아설지 모른다.

따라서 인간 부류 형성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실화를 소설로 묘사한 내용으로 비교를 해보자.

18세기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백인 찰스 존스턴의 예.........

그는 18세기 보통 미국인다운 태도를 지닌 백인으로 자랐다.

그런데 1790년 쇼니 인디언 부족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다른 포로라고는 흑인 노예 한 명뿐이었다.

그때를 존스턴은 이렇게 회상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가까이하지도 않았을 불쌍한 깜둥이가 내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고,

내 마음은 아주 편안했다.”

존스턴은 ‘흑인 대 백인’이라는 분류가 아무 소용없고

오히려 ‘쇼니 인디언 대 영어 사용자’라는 분류가 더 적절한 상황에 놓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존스턴이 평생 고수해온 인종 구분을 무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위의 예에서도 보듯이 인간 부류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한 개인을 단 하나의 인간 부류로 규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흔히 ‘내 편’ ‘네 편’을 가르며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현 정부 초 ‘코드’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야말로 ‘코드가 맞다’는 ‘우리 편’이고 ‘코드가 안 맞다’는 ‘그들’인 것이다.

이렇듯 코드를 운운하며 ‘우리 편’임을 자처하던 인사들이

대선 정국을 맞아 다시 ‘그들’로 편가르기를 시작했다.

이렇게나 쉽게 합치고 갈라서기를 반복하면서도

우리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내 편과 네 편이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서로를 헐뜯고 상처내기를 일삼는다.


늙은이와 젊은이, 기독교도 불교도,

기혼과 미혼, 영남과 호남, 한국인과 미국인, SUV 운전자와 미니밴 운전자…….

사람들을 분류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으며,

이런 분류는 누구나 항상 하는 일이다.

일상적인 결정(저녁식사에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에서부터

일생일대의 선택(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역사적인 대전환점(누구를 상대로 전쟁을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를 좌우하는 것은 누가 어느 편에 속하고

그 속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인식이다.

누구나 동시에 여러 집단에 속할 수 있다.

즉 당신은 여성이자 부모이자 한국인이자 기독교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중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또 그것은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종교, 민족, 인종, 계급을 위해 기꺼이 죽고 죽이는 것일까?


부족적 감각은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노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면

그들은 더욱 무기력한 행동을 보이며,

아시아계 여성들에게 그들이 아시아인임을 상기시키면

여자임을 상기시킨 그룹보다 수학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작은 방 안에서 혼자만 그룹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낸 사람은

누가 봐도 그룹의 의견이 틀리다는 게 명백한데도 대개는 자기 의견을 바꾼다.


부족적 감각은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조작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부족적 수사는 불의와 억압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가 하면,

증오를 접고 화해를 이루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부족적 감각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며,

우리를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틀에서 꺼내어 타인, 과거, 미래와 이어준다.

이런 본능이 오로지 악의 근원인 양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고,

충성심과 믿음이 결코 악용되지 않는 것인 양 찬미하는 사람들도 있다.


매일 아침 뉴스에서는 인간 부류에 관한 다양한 변주를 볼 수 있다.

왜 저들은 ‘자신들이 먹는 것’이 아닌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굶어 죽기를 택했을까?

왜 저들은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자기네’ 군대가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서 저지른 일을 부끄러워할까?

왜 저 군중은 지역의 다른 신도들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그 신도들과 상관없는 종교 학교에 불을 질렀을까?

왜 저들은 소중하고 값진 소유물들이 다른 부류의 의식에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것들을 불태웠을까?

세상을 이해하는 익숙하고 해묵은 경험법칙에 따르면 이런 해묵은 답이 나온다.

그게 그들의 문화이니까,

그게 그들의 혈통이니까,

그게 그들의 역사이니까,

그저 인간 본성이 그러하니까.

상식적인 답으로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상식적인 답에는 두 가지 취향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집단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 만큼 인간의 영혼이 선하고 고귀하다는 찬탄이며,

다른 하나는 부모가 그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무고한 아기도 죽일 만큼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비관이다.

양쪽 다 진부하고 막연한 답이다.

즉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서 세상사를 간과할 수는 없다.

당신이 아무리 인간 부류적 신념의 기원을 잘 설명할 수 있다 해도,

당신 역시 그러한 인간 부류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 부류에 대한 새로운 과학도 정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 부류의 본질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없다.

즉 인종·민족성·성격 특성이 ‘실재한다’거나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시간, 장소, 상황에서는 인종이 실재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인간 부류를 이해하는 더 나은 길은 기존의 어떤 주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 그러한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개인의 의식은 여러 인간 부류들 사이를 오가는데,

그러한 인간 부류들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듯 보인다는 문제다.

우리의 몸과 뇌가 끊임없이 작동하듯이 마음도 그러하다.

나는 하루에만도 수십 가지 인간 부류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우리 마음속에 인간 부류들이 만화경처럼 지나간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서 인간 부류들은 변하기까지 한다.

개념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인간 부류는 기억과 같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마치 변치 않는 과거의 기록을 선반에서 꺼내오는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 뇌에서는 과거의 경험을 지금 여기에 맞는 개정판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강남 사람이라는 인간 부류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재창조하므로,

오늘 아침 내가 생각한 ‘강남 사람’이라는 범주는

2주 전에 생각했던 ‘강남 사람’과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무슬림은 평화를 사랑한다’, ‘

중국인 농부는 근면하다’,

‘미국 사람은 자유분방하다’와 같은 모든 인간 부류의 묘사는 설득의 행위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인간 부류를 묘사하고 그것을 믿으면 당신도 내 말을 듣고 그렇게 믿으며,

우리가 말하는 인간 부류는 점점 더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되어간다.

어쨌든 우리 마음속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인간 부류의 ‘지속’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의 경험이 조직되는 방식에서 무언가가 우리로 하여금

변화무쌍한 우리 마음의 산물이 영구불변하기를 바라게 만든다.

인간 부류와 관련된 수많은 연구들이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던 이유는,

주관적 경험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인간 부류에 관한 객관적 사실을 연구하는 사람들 간에

소통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변하고 있다.

인간 부류가 그처럼 영구불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코드의 이중적 속성에서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지금 이 글자들이 종이 위에 인쇄된 화학물질인 동시에 말들의 나열인 것처럼,

코드를 전달하는 그 어떤 것도 그 자체인 동시에 그것이 표현하는 무엇이다.

인간 부류의 경우에는 사람들 그 자신이 코드의 전달체일 때가 많다.

즉 당신이 만나는 어떤 한국인도

‘김 아무개’라는 그 사람 자체인 동시에 ‘한국인’이라는 일반 개념을 가리키는 존재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코드를 표현한다는 점을 잊어버릴 수 있고,

잊는 법을 학습할 수 있다.

김 아무개라는 개인을 보지 않고 오직 상징만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부류에 관해 해결되지 않은 두 번째 문제는

이러한 정신적 코드가 정확히 어떻게 사람들을 한 범주의 상징으로만 보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즉 코드의 이중성을 잊게 만드는 인간 부류 기능은 어떤 것일까?

인식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속성의 오류).

우리에게는 타인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보는 능력이 있다.

이 모든 코드가 우리의 일상 대화 속에서는 동일한 듯 들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영원하다고 느껴도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는 것.

훗날 그것이 현실과 맞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해도 실질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위축된 분비선처럼 육체적인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

그 때문에 우리는 본말을 전도해,

육체적 변화가 범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

마지막으로, 부당하고 무분별하고 무자비한 그릇된 인간 부류적 판단이 교재와 강의에 포함되고

똑똑하고 자신만만한 교양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

코드는 바로 당신의 머릿속에 있으며 당신에 의해 매일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특별한 기회와 약점들을 지닌 그러한 힘을 형성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힘을 휘두르는 것은 당신이다.

당신의 인간 부류 코드는 당신이 행동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다.

민족적 긴장, 종교적 분쟁, 정치적 갈등, 파벌 간의 경쟁은

결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이하는 저의 출석글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건가요?


인간 부류 형성에 중요한 것은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

‘우리’는 단지 마음이 만드는 산물이다.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이다

인간은 본능처럼 무리를 짓고 집단을 형성해서 산다.


길게 쓰기는 했는데 틀렸습니다.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여 다투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거처로는 땅을 좋다고 하고,

마음은 깊은 것을 좋다고 하고,

사귀는 데는 어진 것을 좋다고 하고,

말은 진실한 것을 좋다고 하고,

정치와 법률은 다스려짐을 좋다고 하고,

일에는 능숙한 것을 좋다고 하고,

움직임에는 때에 맞음을 좋다고 한다.


오직 싸우지 않으니,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마음도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하고,

굳은 것을 만나면 돌아가고,

따듯함이 더해지면 승천(?)하는

도의 경지에 이르면 좋지 않겠습니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마음입니다.

손금, 관상, 골상, 사주 그 어떤 것도 마음먹는 것에 비하면 하찮은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마음에 집착하며 살지 않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