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없는 날
아침에 퇴근하는 날이다.
아내는 친구랑 고향에 다니러 갔다.
집에 일찍 가 봐야 별로 할 일도 없고, 텃밭에서 가을 농사 준비를 한다.
삽질 몇번 하고 나니 등줄기로 내리는 땀 때문에 계속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향집과 지인에게 줄 채소들을 수확한다.
부추도 자르고, 오이도 따고, 호박, 고추, 깻잎, 쌈케일, 적치커리 참외와 토마토 몇개도....
땀으로 범벅된 몸을 찬물로 씻어 내고 고향으로 고고씽.
고향집에는 오랜만에 방문하는 아들을 눈빠지게 기다리는 어머님.
여전히 술이 더 좋아 회관으로 한잔하러 가신 아버님이 계신다.
날이 더워 거동을 줄이신 탓에 어머님은 관절이 더 나빠지졌다.
누님이 넘어져 병원에 입원했었다며 걱정하시는 어머님,
내가 보기엔 어머님이 더 걱정이다.ㅠㅠ
남동생 집을 장만했는데 언제 집들이 한다고 했냐고 성화시다.
난 동생 입주 기념으로 TV 사라고 거금 백만원을 투척했다고 하니,
집안에 낡은 TV를 바라 보신다.
30만원만 있으면 방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TV를 살 수 있을텐데.ㅠㅠ
경제권이 내게 없으니 마음만 무겁다.ㅠㅠ
아버님 모시러 회관에 갔다 동네 냉면집으로 갔다.
정말 맛없는 냉면이다.
4500원 시골인데도 싼편이 아니다.ㅠㅠ
점심식사 후 어머님 관절약을 구입했다.
안구건조증으로 눈이 아프시다고 하셔서 안약도 샀다.
귀가해서 TV 틀어 놓고 누웠는데 잠이 들었다.
단단한 방바닥에 베게만 베고 누웠는데도 고향집이라 그런지 단잠을 잤다.
2시간 넘게 자고 일어나니 어서 가라고 재촉하신다.
대문간에 옥수수, 가지, 오이노각 등 한보따리 장만해 놓으셨다.
시장바구니 손잡이 터진다고 주의시키는데
들은 둥 마는 둥하고 인사를 건넸다.
곧 또 오겠노라고...
차로 한시간도 안 걸리는 고향집인데 참 다녀오기가 쉽지 않다.ㅠㅠ
집에 도착하여 시장바구니를 들고 올라오는데 결국 손잡이가 터졌다.
부실한 바느질 탓이라 생각했다.
집에 와서 냉장고를 정리한다.
텃밭에서 따온 수 많은 채소들이 썩고 있다.
아내가 없는 틈을 타서 한자루는 꺼내 버리고,
종류별로 정리해서 넣었다.
맛있는 옥수수를 압력솥에 넣어 삶고,
설겆이를 한 뒤에
시장바구니 손잡이를 바느질한다.
성질이 워낙 꼼꼼하다 보니 한참 걸린다.
바느질을 끝내고 나서
컴퓨터를 검색한다.
오늘도 자료를 보내달라는 메일, 쪽지가 와 있다.
블로그에도 글이 올라와 있고...
동의보감을 비롯해서 여러 자료들을 원하는 대로 보내고,
한의학 질문에 답장을 쓰고 있으려는데,
난데 없는 플라톤과 관련한 논문을 봐달란다.
거절할 수 없어 받아 읽다 보니 장난이 아니다.
저녁에 돌아온 애들 밥 챙겨주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겆이 하고 틈틈히 논문을 읽었다.
12시가 넘어 맥주통 가져다 놓고 마셔가며
본격적으로 읽고 교정했는데 날을 넘겼다.ㅠㅠ
덕분에 '주홍글자'와 플라톤에 대해 새로운 사실 몇가지를 알게 되었다.
혼자 클래식 음악 틀어 놓고,
땀이 흐르면 샤워를 하고
아무도 없으니 나체로 앉아 글을 읽고 써도 뭐라 하는 사람 없고
지상의 낙원이 따로 없다.
창 밖엔 수없이 구름이 생멸하고
내 마음에도 수 많은 번뇌가 생멸한다.
다 부질없는 것임에도 난 그렇게 살고 있다.
아내가 없으니 생각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만큼 더 많은 죄를 짓고 있다.
그래봐야 어차피 선악이 없으니 죄 역시 없는 것 아닐까?
텃밭에서 따온 토마토나 하나 먹고,
저녁에 올 애들을 위해 옥수수나 마저 삶아야겠다.
저녁엔 술 마시자고 나오라는데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