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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조사결과

별꽃바람 2008. 10. 27. 14:09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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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철야 강좌의 두 번째 숙제였는데 무식하다 보니 어렵네요. 나름대로 인터넷의 바다를 헤맨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래 이 글은 벽암록 40칙 남전화상과 육긍대부의 대화에 나옵니다. 두 사람은 여기에서 승조의 조론에 대한 문답을 합니다.


擧. 陸亘大父, 與南泉語話次, 陸云, 肇法師道,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也甚奇怪. 南泉, 指庭前花, 召大父云, 時人, 見此一株花, 如夢相似.

육긍대부가 질문했다.

"승조(僧肇)법사는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말 훌륭한 말이군요."

남전화상이 정원에 핀 꽃 한 송이를 가리키며 대부를 부르면서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꽃 한 송이의 꽃을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이 보고 있다."


즉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라는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벽암록에서 육긍대부가 말했지만 그 사상은 승조법사의 조론에 나오는 이론인 것입니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참동안 조난(?)을 당한 것이 이 부분입니다. 즉 많은 인터넷 자료에서 이 말을 벽암록에 조법사가 말한 것으로 표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관련문헌을 조금 더 살펴보니 조금 이해가 갑니다. 이 '物我同根 萬物一體(물아동근 만물일체)'의 사상은 멀리 莊子(장자)의 齊物論(제물론)에서 비롯합니다. 관련 글들은 아래에 첨부했으므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식하고 무능해서 진리를 말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안타깝습니다.


장자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죠.

“하루살이에게 내일 설명하는 것과 매미에게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날의 풍경을 이해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저처럼 무지한 인간에게 진리를 설명하려고 애쓰시는 김홍경선생님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승조와 조론(백과사전에서)

승조 (중국 동진 [東晉] 불교철학자)

[僧肇, Sengchao]

출처: 브리태니커


(병)Sengzhao (웨)Sengchao. 384~414.

중국 동진(東晉)의 불교철학자.

세속의 성은 장(張)이며, 경조(京兆:지금의 시안[西安]) 사람이다. 원래는 〈노자 老子〉·〈장자 莊子〉를 좋아했는데, 구역 〈유마힐경 維摩詰經〉을 읽은 뒤 감동을 받고, 사상의 귀의처라고 생각하여 출가했다.

얼마 있지 않아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고장(姑臧:지금의 간쑤 성[甘肅省] 우웨이 시[武威市])에 오자 그에게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구마라집을 따라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으로 가서 역경사업에 참여하여 구마라집의 유능한 보조자가 되었다.

승예(僧叡) 등과 함께 경론을 자세히 연구하고 구마라집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했으며, 반야학(般若學)에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승조는 구마라집의 문하에서 '공의 이해에는 제일'(解空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승조는 당시 불교학자들의 저서가 문장이 난잡하고 해설이 잘못되어 불교의 본뜻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유창한 문체로 반야공(般若空)의 기본원리를 분명하고 적절하게 표현해냈다. 그의 〈반야무지론 般若無知論〉은 구마라집과 혜원(慧遠)의 극찬을 받았다.

저서로는 〈부진공론 不眞空論〉·〈물불천론 物不遷論〉·〈유마힐경주 維摩詰經注〉 등이 있으며 중국 불교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부진공론〉은 삼론종(三論宗)의 이론적 근원이 되어 길장(吉藏)은 '현종(玄宗)의 시조'라고 받들었으니 그는 삼론종의 실질적인 창시자였다.



조론 [Chao lun]

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병)Zhao lun (웨)Chao lun.

중국 동진(東晉)의 불교철학자인 승조(僧肇:384~414)의 논문집.

〈상진왕표 上秦王表〉와 권두의 〈종본의 宗本義〉 외에 다음의 4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① 〈물불천론 物不遷論〉:동·정(動靜)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동과 정은 다르지 않으며 천(遷)이 바로 불천(不遷)이므로 세상에는 진정한 발전·변화가 없다는 논리이다.

② 〈불진공론 不眞空論〉:심무종(心無宗)·즉색종(卽色宗)·본무종(本無宗)의 사상을 비판하고, 세계만물은 모두 인연으로 생겨난 것으로서 '가명'(假名), '부진'(不眞)이기 때문에 공(空)이라는 논리이다.

③ 〈반야무지론 般若無知論〉:'반야'는 '알지도 못하고 형체·실체도 없으나'(無知無相),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無所不知) 지가 바로 부지라는 논리이다.

④ 〈열반무명론 涅槃無名論〉:'구절십연'(九折十演)의 총 19장으로 되어 있는데, 열반은 생멸(生滅)하지 않으며 명상(名相)이 없기 때문에 명칭과 언어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 책은 대략 남조 진(陳)나라 때 편찬되었는데, 그 가운데 〈상진왕표〉·〈종본의〉·〈열반무명론〉은 위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중국 불교사상사 및 불교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저서이다.

벽암록 40칙 남전화상과 육긍대부

“분별심 갖고 '만물일체' 논하는 건 무의미”


{벽암록}제40칙은 남전화상과 육긍대부(陸亘大夫)와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육긍대부가 남전화상과 대화를 나누면서, 육긍대부가 질문했다. "승조(僧肇)법사는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말 훌륭한 말이군요."


남전화상이 정원에 핀 꽃 한 송이를 가리키며 대부를 부르면서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꽃 한 송이의 꽃을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이 보고 있다."


擧. 陸亘大父, 與南泉語話次, 陸云, 肇法師道,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也甚奇怪. 南泉, 指庭前花, 召大父云, 時人, 見此一株花, 如夢相似.


이 공안은 {전등록} 제8권 남전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는데, 남전화상에 대해서는 이미 {벽암록} 제28칙에서 언급하였다. 육긍대부(陸亘:764~834)는 당나라 헌종을 모셨고,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 관리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육긍대부는 승조법사의 이 말이 너무나 훌륭하다고 남전화상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묻고 있다. '기괴(奇怪)'라는 말은 본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이지만, 원오가 '평창'에 '기특(奇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뛰어난 안목을 갖춘 훌륭한 말이라고 찬탄한 것이다.


승조법사가 말한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란 불교에서 제시한 일체 만법의 근본은 공(空)이라는 '일체개공(一切皆空)'과 {신심명}에서 '만법(萬法)은 하나(一如)'라고 말하고 있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말한 것이다. 일체의 만법(만물)이 인연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삼라만상의 차별세계가 형성된다.


일찍이 남전화상을 참문하고 뛰어난 지혜를 체득한 거사로서 {전등록} 제8권에는 남전화상(南泉和尙: 738~834)과 많은 선문답을 남기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육긍대부는 남전화상을 오래 참문하였다. 평소 불법의 대의(理性)에 마음을 두고 깊이 {조론}을 연구하였다.



승조법사(法師) 僧肇法師


어린시절 {장자}와 {노자}를 탐독하고 그 뒤에 고본(古本) {유마경}을 베껴 쓰다 깨치고, {장자} {노자}에는 참된 진실이 없음을 알고, 여러 경전을 종합하여 네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장자} {노자}에서는 천지란 큰 형체를 갖고, 나의 형체도 또한 그와 같아 모두 허무(虛無) 그 가운데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장자}의 대의는 만물이란 본질적으로 똑같다(齊物)는 것을 논했을 뿐이지만, 승조법사가 주장한 대의는 만물의 자성이란 모두 자기에게로 귀결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듣지 못했는가? 승조법사의 {열반무명론}에서 "훌륭한 사람(至人)은 텅 비어 아무런 형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그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만물을 모두 자기로 삼는 자가 어찌 성인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신(神)이나, 사람, 현인(賢人), 성인(聖人)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 같은 성품과 같은 바탕을 지녔다.


본칙에서 육긍대부가 제시한 말은 {조론} '열반무명론'에 나오는 말인데, 원래 {장자} '제물론'에서 '천지는 나와 함께 살아있고, 만물도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이란 말을 승조는 불교사상에서 천지동근, 만물일체(天地同根 萬物一體)라는 말로 만들어 새롭게 주장하고 있다. 승조의 {조론}은 삼론종과 천태종, 화엄종 등 중국의 교학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인데, 석두희천은 이 책을 읽고,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다'라는 말에 크게 깨닫고 {참동계(參同契)}라는 저술을 지었다.



이러한 만물의 상대적인 차별경계에 집착된 중생은 자타(自他)와 주객(主客), 천지(天地)의 만물을 상대적인 분별심으로 나누고 비교하여 차별심을 일으키며 업장을 만들고 이에 따른 과보의 고통을 받게 되는 중생이 된다. 그러나 일체 만물(만법)의 본래 모습은 절대 평등한 세계로서, 둘이 아닌 하나(一如, 不二)의 경지인 텅 빈 공(空, 同根)이라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장자}의 말에 의거하여 중국적인 표현으로 주장한 것이다.


인간이 병이 났을 때 먹는 한약은 돌가루나 풀과 나무 열매, 뿌리, 씨앗을 비롯해서 동식물의 신체 일부 등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수집하여 조제하고 물을 붓고 불로 달여서 만든 액체를 마시며 인간의 육체적인 본래의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고 있다.


병을 회복하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매일 먹고 마시는 음식물은 동물과 식물, 광물성을 먹고 마시며 인간의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자료나 영양분을 섭취하는 모든 자료가 자연의 일체 만물인 것이다. 만약 일체 만물과 같은 동질성의 뿌리(근거)가 아니라면 먹고 마시고 호흡하고 영양분을 섭취하고 나눌 수가 없는 것이며 나의 존재나 삶을 영위할 수도 없다.


자연의 일체 모든 만물과 하나 된 경지에서 자연인 인간의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체 만물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만물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인 마음도 절대 평등의 입장이 똑같은 하나의 뿌리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사상이다.


남전화상은 육긍대부의 이러한 질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냥 정원에 핀 목단 꽃 한 송이를 가리키며 대부의 이름을 부르며, "요즘 사람들은 이 목단 꽃 한 송이를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이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육긍대부의 질문은 매우 기특하기는 하지만, 교학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만일 교학의 이치를 지극한 법칙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 무엇 때문에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또한 달마조사는 서쪽에서 왔겠는가?' 즉 승조법사가 말한 것처럼, '천지가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이치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천지 만물과 어떻게 똑같은 뿌리(同根)이며, 어떻게 한 몸(一體)이 되는 것인지,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꿈도 꾸지 못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천지 만물이 모두 제각기 제멋대로이며, 한 뿌리(同根), 한 몸(一體)이 되지 못하고 있고, 일심(一心)은 일심대로 만물은 만물대로 제각기 따로따로 주객의 차별경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만법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승조법사가 좋은 말을 했다고 인용해도 세상 사람들은 한 송이 목단 꽃을 보는 것과 같이, 꿈을 꾸면서 잠꼬대를 하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제법의 참된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과 꽃을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경계로 나누어 보고 있으며, 꽃과 자기가 하나 된 만법 일여(一如)의 경지에서 지금 여기자기 자신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지 못하고 있는 수행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듣고, 보고, 자각하여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다'라는 말은 '천지동근 만물일여(天地同根 萬物一體)'를 반대 측면에서 읊은 말인데, 일체 만물을 보고 듣고 자각하는 마음(주체)과 객체인 만물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唯識)에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인식하는 그 가운데 천지 만물과 하나 된 경지인 것이다. '산하(山河)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 천지 만물은 각자의 마음 거울(心鏡)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이 일체 만물이 그대로 무심의 거울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 달이 지고 깊은 한밤중에 만물과 하나 된 적정의 세계(一如平等)에서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무심의 경지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누구와 함께 이러한 깨달음의 풍광(風光)을 나누랴! 천지가 한 뿌리며, 만물이 일체라는 이치나 주장을 논의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석승조(釋僧肇) 


  승조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대서(代書)로 업을 삼았다. 마침내 책을 베껴 씀을 인연하여 경전과 역사를 두루 읽고, 고전문헌을 갖추어 다 읽었다. 그윽하고 미묘한 진리를 좋아하여, 늘 『노자』와 『장자』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어느 날 『노자』의 [덕장(德章)]을 읽다가 탄식하였다.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그러나 정신이 그윽함에 깃드는 방법을 기약하기에는, 아직 선(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그 후 그는 구역 『유마경』을 보고 기뻐하였다. 머리위로 받들어 펼쳐 그 의미를 찾아 완상하고는 말하였다.

  “비로소 귀의할 곳을 알았다.”


  이를 인연으로 출가하였다. 배움이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삼장에 뛰어났다. 나이가 스무 살 때 이름을 관중과 조정에 떨쳤다. 당시 명예를 다투는 무리들이 그의 일찍 출세한 것을 시기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 천리 밖의 먼 곳에서 책을 지고 달려와, 관중으로 와서는 변론을 겨루기도 하였다. 승조는 이미 재치 있는 생각이 아득하고 현묘한 데다 더욱이 담론에 뛰어났다. 핵심을 타서 그들의 날카로움을 꺾어, 일찍이 흘려 지나치거나 막히는 일이 없었다.


  당시 경조의 덕망 있는 유학자나 관외의 빼어난 선비들치고, 그의 칼날 같은 변론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기운을 누르고 콧대를 꺾었다.


  그 후 구마라집이 고장(姑藏)에 이르렀다. 승조가 먼 곳에서 찾아가 따르자 구마라집은 끝없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으로 가자, 승조도 그를 따라 돌아왔다. 요흥(姚興)은 승조에게 명하여, 승예(僧叡) 등과 더불어 소요원(逍遙園)에 들게 하여, 경론을 자세히 가다듬는 일을 돕게 하였다.


  승조는 성인의 시대와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글 뜻에 조잡한 곳이 많다고 여겼다. 먼저 예전에 해석한 경전에서 때로 틀리고 잘못된 곳에 대해, 구마라집을 만나 묻고 배워서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대품경』을 번역한 후에, 승조는 곧 모두 2천여 글자에 이르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3)을 지었다. 마침내 구마라집에게 바치니, 구마라집이 이를 읽고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이어 승조에게 말하였다. 

  “나의 이해력으로는 그대를 물리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할 때 서로 공경하도록 하자.”


  당시 여산의 숨어사는 선비 유유민(劉遺民)이 승조의 이 논을 보고 곧 찬탄하였다.

  “뜻밖에 방포(方袍: 승려의 外衣)에도 다시 평숙(平叔: 漢代의 文章家)이 있구나.”


  이어 이것을 혜원에게 보이니, 혜원이 책상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그러고는 함께 펴서 완미하기를 거듭 되풀이하였다. 유유민은 승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 아름다운 물음을 받고, 멀리 우러러보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연말의 엄한 추위에 건강은 어떻습니까? 소식을 전할 길이 막히니, 더욱 끌리고 답답한 마음만 더해집니다. 제자는 시골구석에서 오래된 병으로 항상 앓습니다. 대중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바라며, 외국에서 온 법사들께서도 편안하고 건강하십니까?


  지난해 여름 끝 무렵에 상인(上人)의 『반야무지론』을 보았습니다. 재주의 운용이 맑고 걸출하시며, 취지 가운데는 깊이 진실한 맛이 담겼습니다. 성인의 글을 미루어 밟아나가, 완연히 돌아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펴서 정중하게 완미해 보니,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대승의 깊은 못에서 목욕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품은 회포가 그윽함조차 끊어버린 곳에 있음을 깨달았고, 정교한 솜씨를 다하여 어느 곳도 빈틈이 없습니다. 다만 어두운 사람이라 깨닫기 어려워 아직도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문득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말씀드립니다. 원컨대 조용한 여가에 거칠게나마 이를 풀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승조는 편지로 화답했다.

  “예전에 뵈옵지 못하여 우두커니 상상하느라 수고로울 따름입니다. 전에 보내신 소(疏)와 질문을 펴놓고, 반복해서 그 취지를 찾아보니 기쁘기가 잠시나마 마주 대한 듯하였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삼가 할 절기에, 요즘 항상 어떻게 지내십니까?


  빈도는 고단한 병으로 늘 몸이 좋지 않습니다만, 이곳 대중 가운데 몸담으며 심상하게 지낸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은 크게 건승하십니다.


  후진(後秦)의 임금4)은 도에 대한 성품이 자연스러워, 타고난 기틀이 속인을 뛰어넘습니다. 삼보를 확고하게 지키고, 도를 펴는 데 힘씁니다. 이로 말미암아 색다른 경전과 뛰어난 승려들이 먼 곳에서부터 이르러, 영취산의 기풍이 이 땅에 모여듭니다. 이를 이끄는 임금의 원대한 거동은 곧 천 년에 한번 있을 나루터나 대들보라 하겠습니다. 서역에서 돌아와 대승의 새로운 경전 2백 여 부를 가져왔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이 대사(大寺)에서 새롭게 여러 경전을 번역하니, 법장(法藏)의 깊고 넓음이 나날이 각별하게 들립니다.


  선사(禪師)5)는 와관사(瓦官寺)에서 선도(禪道)를 가르치니, 문도 수백 명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며 화목하고 엄숙하여,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또 삼장법사6)는 중사(中寺)에서 율부를 출간하였습니다. 근본과 지말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마치 부처님께서 처음 제정한 것을 보는 듯합니다. 비바사(毘婆娑)7) 법사는 석양사(石羊寺)에서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을 출간하였습니다. 범어 원본이라 비록 아직 번역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질문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은 신기(新奇)합니다.


  빈도는 일생을 분수에 넘치게 아름다운 운세에 참여하고 성대한 교화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석가모니의 열반의 집회를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그밖에 저에게 무슨 남은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도가 뛰어난 군자와 이 법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제 글이 깊이 있다고 칭찬하시고, 애오라지 다시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어 오신 내용이 완곡하고 절실하여, 제가 영읍(?邑)의 목공처럼 마음대로 요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빈도는 생각이 미세한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아울러 글과 말에 서투릅니다. 게다가 또 지극한 취지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하면 근본 종지와는 뒤틀립니다. 이러쿵저러쿵 그만두지 않고 말해 보았자 끝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미친 사람의 말로서 보내오신 취지에 대답할 따름입니다.”

  

그 후 승조는 다시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 등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에 주석을 달고, 여러 경론의 서문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그 후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길이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추도하였다. 발돋움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사무쳐서 마침내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그 글에서 말한다.

  “경에서는 유여열반(有餘涅槃)·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한다. ‘열반’이란 범어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또한 ‘멸도(滅度)’라고도 표현한다. 무위라는 것은 허무적막(虛無寂寞)함이 유위의 세계보다 미묘하게 뛰어남을 취한 것이다. ‘멸도’라는 것은 큰 근심이 영원히 끊어져 4류(流)를 뛰어넘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대개 거울에 비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요, 칭호가 단절된 그윽한 집이다. 그러나 ‘유여’와 ‘무여’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나온 곳이 다른 호칭일 것이며, 중생에게 응대하는 거짓이름일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번 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무릇 열반의 도라는 것은 고요하고 텅 비어서 형체나 표현으로 얻을 수 없다. 미묘하고 상(相)이 없어서 마음으로 알 수가 없다. 뭇 존재를 뛰어넘어 그윽한 세계로 올라가고, 태허의 허공을 헤아려서 길이 오래간다. 이를 쫓아가려 해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가 없다.


  6취(趣)로도 그 태어남을 거두어드릴 수 없다. 힘으로 밀어붙여도 그 바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득하게 멀고 황홀하여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다섯 개의 눈으로도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두 귀로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어둡고 그윽하니, 누가 이를 보았으며 누가 이를 깨달았겠는가? 두루 다스려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서, 홀로 유·무의 세계 밖에 그 자취를 끌고 간다. 그러므로 이를 말하는 사람은 그 진실을 잃는다. 이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어리석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본성과 어긋나며, 이를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 바탕을 다친다.


  그런 까닭에 석가모니는 마갈성(摩竭城)에서 방문을 닫았고, 유마거사는 비야리성(毘耶里城)에서 입을 다물었다. 수보리(須菩提)는 무(無)의 설을 제창함으로써 도를 밝혔고, 제석과 대범천은 들음을 끊음으로써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러한 모든 진리는 신(神)이 거느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입은 이를 위하여 다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말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말한다.

  “진정한 해탈이란 말의 작용을 벗어난 것이다. 적멸에 영원히 편히 머물러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으며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맑고 고요하기가 허공과 같아, 이름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


  논(論)에서는 말한다.

  “열반은 유(有)도 아니다. 또한 무(無)도 아니다. 말로 표현할 길은 끊어지고, 마음으로 행할 곳도 멸한 경지이다.”


  무릇 경론을 지은 취지를 찾아보면, 이것이 어찌 허구의 말이겠는가? 결과적으로 유(有)가 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有)가 없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의 경계에서 근본을 따져보면, 5음(陰)은 영원히 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의 고을에서 미루어 나가면, 그윽한 신령함은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윽한 신령이 다하지 않으면, 맑고 고요한 하나(도)를 품는다. 5음이 영원히 멸하면, 모든 번뇌를 다 버린다. 모든 번뇌를 다 버리기 때문에 도와 함께 상통한다. 맑고 고요하게 하나를 품기 때문에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다.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기 때문에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한다. 도와 함께 상통하기 때문에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다.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을 ‘유’라 할 수 없다.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하는 것을 ‘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와 ‘무’가 내부에서 단절되고, 일컬어지고 말하는 일이 외부에서 가라앉아, 보고 듣는 일이 미치지 못하는, 4공(空)이 어두운 경지이다. 맑으면서도 평탄하고 머무르면서도 크나큰 경지이다. 9류(流)가 여기에서 서로서로 귀의한다. 뭇 성인이 여기에서 그윽하게 만난다. 이것이 곧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경지이며, 크게 그윽한 고을이다. 그런데도 ‘유’와 ‘무’로써 그 방향과 구역을 규정지어 신비한 도의 경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어찌 아득히 먼 거리의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그 뒤에도 열 번 펼치려다 아홉 번 구부려[十演九折] 무릇 수천 글자에 이르렀다. 그러나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여기에다 싣지 못한다.


  논이 이루어진 후에 요흥(姚興)에게 표(表)를 올렸다.

  “저는 아뢰옵나이다. 하늘은 하나(도)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며, 군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옵니다.8)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사리에 밝고 슬기로우며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십니다. 도와 정신이 잘 만나서 나라 안의 인심과 미묘하게 일치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라의 온갖 기틀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고 하루 종일 도를 펴는 데 힘써, 창생들이 의지하고 힘입도록 글을 드리우셔서 모범을 지으십니다. 그런 까닭에 지경 안에 네 가지 큰 것 가운데 임금이 그 하나로 자리잡은 것입니다.9)


  열반의 도라는 것은 무릇 삼승의 귀의하는 곳이자, 대승의 깊은 곳집입니다. 그 경지는 멀고 아득하여 어렴풋한 세계입니다. 보고 듣는 영역이 끊어져 그윽하게 텅 비고 아득하여, 뭇 중생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저는 미천한 몸으로 분수에 넘치게 나라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배움터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구마라집 문하에 있기를 십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많은 경전의 취향이 다르고 뛰어난 귀취가 같지 않더라도, 열반이라는 하나의 진리만은 항상 가장 먼저 듣고 익혀 왔습니다. 다만 저는 재주와 식견이 어둡고 짧아, 비록 여러 번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막막한 생각을 품어 어리석음이 다하도록 그만두지 못합니다.


  또한 마치 어떤 깨우침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높고 뛰어난 분이 먼저 제창하신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감히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구마라집 스승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묻고 참고할 곳이 없는 바가 길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외롭지 않아 홀로 구마라집 스승님과 정신으로 계합하시고, 일을 알며 도가 자리한 곳을 목격하여 당신의 그 마음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마라집 스승님의 현묘한 도풍을 진작시켜, 말세의 풍속을 계도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안성후(安成侯) 요숭(姚嵩)으로부터 무위(無爲)의 가르침의 궁극을 묻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자못 열반무명(涅槃無名)의 내용과 서로 넘나듦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득 『열반무명론』을 지었습니다. 열 번을 펼치려다 아홉 번을 구부린 엉터리 글입니다. 그렇지만 널리 수많은 경전의 이치를 캐내어, 그 증거에 기탁하여 비유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으로서 폐하의 무명의 이루심을 우러러 진술하였습니다.


  어찌 정신과 마음을 활짝 열고, 멀고도 마땅한 경지를 끝까지 다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불문에 논의를 일으키고, 학도들에게 나눠주어 깨우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임금님의 뜻에 참고가 된다면 보존하여 기록해 주시기 원하옵니다. 만약 차질을 빚는다면 내리시는 뜻에 엎드려 따르겠습니다.”


  요흥의 회답한 요지는 정성스러웠다. 이에 찬양의 말을 갖추어 더하고는, 곧 칙명을 내려 베껴 쓰게 하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당시에 중히 여겨진 바가 이와 같았다.


  진(晋) 의희(義熙) 10년(414)에 장안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파야무지론(波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나, 송(宋)·원(元)·명(明) 세 본과 궁(宮)본에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 


4) 요장(姚?)의 아들 요흥(姚興)이다. 서쪽으로 여륭의 군대를 깨뜨리고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요흥은 사문 승예(僧叡)·승조(僧肇) 등 8백 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구역경전을 재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여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았다. 요흥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어서,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5)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이다.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한다. 본래의 성은 석씨(釋氏)이고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천축국의 나가리성(那呵利城)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대선(佛大先) 대선사(大禪師)에게 수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써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한 승가달다(僧伽達多)와 계빈국(?賓國)에 노닐며 같은 장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계빈국으로 가서,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인물로 추천받아, 함께 중국에 왔다.


6) 불야다라(弗若多羅) 삼장(三藏)이다. 중국말로 공덕화(功德華)라 하며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두루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정통하였다.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연간(399~416)에 지팡이를 짚고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진나라 임금 요홍(姚泓)은 위진(僞秦) 홍시 6년(404) 10월 17일에 장안(長安)의 중사(中寺)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 수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맞이했다. 불야다라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는 병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하직하였다. 


7) 담마야사(曇摩耶舍)이다. 중국말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연간 중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毘婆沙律)?을 잘 외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에는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 불렀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長安)으로 갔다. 천축국의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407)에 처음으로 범서(梵書)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년(414)에 이르러 번역을 마쳤다. 모두 22권이다. 위태자(僞太子) 요홍(姚泓)이 이치와 의미에 친히 관여하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해 서문을 썼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을 떠돌다, 신사(辛寺)에 머물러서 크게 선법(禪法)을 펼쳤다. 송나라 원가(元嘉, 424~452) 연간 중에 서역으로 돌아갔다. 임종한 곳을 알지 못한다. 


8) 『노자』 39장. 

9) 그러므로 도가 크나큰 어떤 것이라면 하늘땅이 크고 왕 또한 크다. 우리가 사는 지경 중에 네 가지 크나큰 어떤 것이 있는데, 왕이 그 중 하나로 머무른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절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승조법사 조론소개

송찬우 역 <조론>, 고려원. 1989.


당시는 6,000원의 가격으로도 잘 팔리지 않았지만, 책 뒤에 원본도 실려있어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지만, 지금은 절판되어 6만원을 주고도 못사보는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책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384-414)는 용수의 중관불교를 중국에 이식하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승조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북서 지역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서적을 필사수리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난 가난으로 인한 이 작업은 승조에게 혜안을 열어 주었다. 그는 서적을 필사, 수리하면서 맡긴 경과 사를 숙독하고 고전에 능통하게 된다. 특히 도가의 심원한 형이상학에 심취해 있었다. 도가의 서적을 읽은 승조는 말했다. -참으로 고매하고 아름다운 사상이다. 이 땅에 이러한 사상이 있다는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죽음과 해탈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불교를 도교식으로 해석한 격의 불교의 문제점도 잘 알고 있었다. -여러가지 좋은 말들이 많지만, 어디까지가 정확한 것인지 알수도 없고, 옛 성인들이 떠나신지 오래되어 물을 수도 없어 경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어렵다. 그러다가 오나라의 삼장 지겸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 기쁨에 넘쳐서 외쳤다. -이것이다. 여기에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비로소 사나이가 갈 길을 알았다. 그는 확신에 차서 출가의 삶으로 나아갔다. 출가한 승조는 방등과 소승의 삼장을 열심히 탐구했다. 조숙했던 그는 이미 20대의 젊은 나이에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 당시 명예를 다투던 무리들이 그와 논쟁을 했으나 승조는 능숙한 논조로 그들을 굴복시켰다. 그는 위대한 불교 사상가이며, 경전불교의 완성자 구마라습을 보려고 중앙아시아의 오지로 달려갔다. 구마라습은 젊은 중국인 수재의 재능과 열정에 뛸듯이 기뻐하며 성심껏 가르쳤다. 승조는 구마라습을 통해서 대승불교의 정교한 철학적 체게에 대해서 훈련을 쌓았다. 401년, 전진의 부견왕에 의해 쿠마라집(구마라습)이 장안에 가게 되자 승조는 스승과 함께 갔다. 그 후 승조는 스승이 주재하는 역경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승조의 원숙한 중국 고전 이해와 문장력은 스승의 역경 사업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승조는 인도 정신과 중국 정신과의 차이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인도 불교와 중국 철학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불교를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 결실이 바로 불멸의 고전인 <조론>이다.


그는 401년부터 그가 눈을 감은 414년 사이에 가장 독창적인 불교 그룹이었던 여산廬山의 혜원교단과 서신왕래를 하기도 하였다. 413년 스승의 입적을 지켜보고, 414년 자신도 열반에 들었다. 마치 자신의 일을 예견하듯이, 409년 유유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빈도는 병든 몸으로 아름답지 못한 일을 많이 당하는군요. 후일 법난을 당하여 많은 스님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승조도 왕 앞에 끌려갔다. 이미 처형당한 승려들의 머리가 땅바닥에 널려 있었고, 피가 낭자했다. -그대가 그 유명한 승조로구먼. 내 그대의 재주를 아껴서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겠네. 자네 승려들은 죽음을 두려하지 않는다면서? 나를 무섭다고 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을 하면 살려 주겠네. 승조는 이런 놀림까지 받아가며 살 생각이 없었다. 땅을 한번 쳐다보고는 얼굴을 들어 말했다.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음은 본래 공이다.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지나도 그것은 봄바람을 베는 것일 뿐.[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刀 猶似斬春風]


왕은 벌컥 화를 내며 승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사나이의 칼이 번쩍하는 순간 승조의 머리는 허공을 날았다. 어떤 사람들은 수준 낮은 왕앞에서 고매한 진리를 설하기보다는 약간의 방편을 써서 목숨을 구한 다음 뛰어난 재주로 후세 사람들을 위해 탁월한 업적을 남기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승조는 철저하게 살다 죽었다.


승조 [僧肇, 374~414]


중국 진(晉)나라시절 구마라습(鳩摩羅什)하에서 인도 용수계(龍樹系)의 대승불교를 공부했다. 그가 남긴 논문집 《조론(肇論)》은 대승의 공(空)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 것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적

 

중국 진(晉)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중국 산시성[陝西省] 장안[長安:西安]

주요저서

 

《조론(肇論)》,《보장론(寶藏論)》


산시성[陝西省] 장안[長安:西安] 출생. 가난하여 소년시절부터 서사가(書寫家)로 고용되어 생계를 꾸려나가는 동안에 유교와 역사의 고전에 통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노자의 《도덕경(道德經)》도 흡족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느꼈는데, 《유마경(維摩經)》을 읽고서 환희가 넘쳐나 불문에 귀의하여, 20세 무렵에는 벌써 장안[長安]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때마침 구자국(龜玆國)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고장(姑臧)에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인도 용수계(龍樹系)의 대승불교를 공부했다. 401년 구마라습이 장안에서 후진 왕의 명을 받고 국가사업으로 불전의 대번역과 강술을 시작하자, 그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서 활약하였기에 승략(僧 ) ·도항(道恒) ·승예(僧叡)와 함께 구마라습 문하 사철(四哲)로 일컬어진다.


조론 [肇論]

《물불천론(物不遷論)》 《부진공론(不眞空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등을 담은 그의 논문집 《조론(肇論)》은 대승의 공(空)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 것으로서, 뒤의 중국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저서 중에도 《보장론(寶藏論)》(1권)은 당시 그가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있었던가를 보여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肇論


肇論의 서문에 이르기를 조론의 肇자는 이 논서를 지은 사람의 이름인데, 그 이름이 僧肇라고 밝히고 있다. 鳩摩羅什 대사의 문하 가운데 4명의 수제자를 일컬어 四哲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철 가운데 한 사람이 승조법사이며, 특히 논의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온다. 그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비극적인 일생을 마치는데, 그가 생전에 지은 저술이 肇論과 寶藏論이다. 보장론은 그가 옥중에서 처형 날짜를 기다리며, 일주일 동안 쓴 글이며, 조론은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에 걸쳐 완성한 논문으로 위대한 천재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가 생존 했던 당시 중국불교의 시대 상황은 魏晋의 格義佛敎 시대였다. 당시만 해도 서역에서 건너온 佛典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의 대의가 그리 선양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 당시 사상가나 고승들 역시 불교에서 설파한 空과 실상의 언어적 개념이 실제로는 둘이 아니 中道의 이치임을 모르고 기존 노장학의 虛無사상으로 잘못 오해하고 받아들인 경우가 있었다. 특히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한 저술까지 유행해, 불교의 대의인 중도사상이 크게 오도되었는데, 晋나라 道恒의 無心論과 道林의 卽色遊玄論, 竺法汰의 本無論이 그 대표적인 예 이다.


승조법사는 이러한 배경에서 그들의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고 불교 성립의 대의를 밝히기 위해 불교사상사의 불후의 금자탑인 조론을 쓰게 되었다. 조론에 사용된 단어는 총 2만 단어에 미치질 못하고, 목차는 현상론으로서의 物不遷論, 본질론으로서의 不眞空論, 이 둘에 대한 인식론으로서의 般若無知論, 이상의 수행과정을 통한 결과론으로서의 涅槃無名論인 4편에 지나지 않는 짧은 논문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방대하며, 부처님의 설법이 모두 담겨 있고, 그 의미가 끝까지 추구되어 있다.


부처님의 일대 교설 가운데서 본질인 진제의 측면을 담론하면, 현상의 사물은 遷流하지 않는 眞如性空의 常이라 말하고, 현상인 속제를 이야기하면 모든 사물은 찰라에 流動遷流하는 생멸의 無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常과 無常 어느 한 쪽에 집착한 미혹을 타파해주려고 서로 상반된 언어를 구사했을 뿐이다. 이를 흔히 隨處作主이고, 應病與藥의 方便道라고 말하기도 한다.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이 이런 상과 무상에 대한 말을 듣고, 이 상과 무상이 일심중도로 귀결시키는 이치라는 것을 모른다. 그 때문에 도리어 상과 무상을 상반되게 표현된 언어의 차이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열반법은 상주불변하는 실유라고 집착하게 되어 상과 무상이 둘이 아닌 중도의 이치를 미혹하게 된다.


이처럼 상대적인 실유, 실무에 집착하여, 환언하면 상견과 단견에 떨어지기 때문에 본래 줄이 아닌 본무의 일심이 진속 이제를 따라 둘로 다르다고 착각하는 전도된 견해가 일어나게 된다. 그 결과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진속이 둘이 아닌 불유, 불무의 일심중도와는 전혀 궤를 달리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육도 사생의의 끝없는 생사인 생멸의 십이연기가 이 때문에 영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부처인 중생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인 무생십이연기의 연기즉공인 중도가 환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구경중생인 부처가 되지 못하는 소이이이기도 하다. 논주인 승조법사가 이런 범부의 어리석음을 타파하기 위해 <물불천론>에서 이 문제를 우선적으로 논파하였다. 즉 사물의 현상이란 연기즉공으로서의 천류이기 때문에 천류하나, 천류하는 자체는 성공의 무상이며, 성공의 무상이기 때문에 천류하는 사물의 자체는 불천의 상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禪宗의 僧肇 自然觀 受容에 관한 問題

A Problem Concerning the Zen Sect Accepts Sengchao's View of the Nature


金 珠 經 (Kim Chu-kyung) : 동국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목     차

Ⅰ. 緖言(서언)    

Ⅱ. 禪師들에 의한 僧肇 動靜相卽觀의 受容

Ⅲ. 中國的 思想 傳統인 體用 論理의 展開

Ⅳ. 인도 수행의 中國的 變換

Ⅴ. 결  어


Ⅰ. 緖言

僧肇(승조)는 般若·空(반야·공)을 중심으로 이전의 각 학설을 비교해서 이해하고, 덧붙여 인식론적인 각도에서 [肇論(조론)]을 저술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외래 사상인 반야사상 이해에 대한 논쟁이 승조에 의해 일단락지어졌는데, 승조의 著述(저술)과 활동은 불교가 중국철학의 중심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중국인은 주로 우주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에 전래된 인도의 대승불교는 우주론보다는 인식론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승조는 중국인 특유의 관심 분야인 우주론 문제에 부딪치게 되자, 자연히 玄學(현학)에 의해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런 결점이 오히려 이후 중국불교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적인 사상들이 그 속에 뒤섞여 더욱 더 신비화하는 경향으로 발전하였고, 선종이 성립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선종은 중국인의 사유와 실천에서 생겨난 가장 중국적인 불교이다.

禪宗()은 佛心宗(불심종) 혹은 心宗(심종)이라고도 칭해진다. 선종이라는 이름은 唐代(당대)에 시작되며, 일종의 禪法(선법)인 不立文字(불립문자)·直指人心(직지인심)·見性成佛(견성성불) 등이 전해져 왔다. 佛 在世時(불 재세시)에 세존께서 영축산에서 말없이 꽃을 들고 대중에게 보이니, 아무도 그 뜻을 몰랐으나 摩訶迦葉(마가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佛法(불법)이 체득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 일을 두고 오직 摩訶迦葉(마가가섭)만이 正法眼藏(정법안장)·涅槃妙心(열반묘심)을 받았다고 하고, 마하가섭부터 28대 달마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달마는 중국에 건너와 중국 선종의 초조가 되었는데, 佛法天子(불법천자)인 梁武帝(양무제)와 만나 無功德(무공덕)이라는 한마디를 吐(토)한 후,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 9년 간 면벽했으며, 눈밭에서 팔을 잘라 求法(구법)의 의지를 보인 慧可(혜가)에게 법을 부촉하고는, 그 傳法(전법)의 증명으로서 한 벌의 가사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혜가는 그 법을 僧璨(승찬)에게 전했으며, 이후 道信·弘忍·慧能(도신·홍인·혜능)의 순서로 전해지고, 이들에 의해 선종은 크게 펼쳐진다. 이와 같은 중국 선종의 傳法系譜說(전법계보설)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景德傳燈錄(경덕전등록) 등의 선종계 문헌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승조의 견해가 후대 선사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주목적이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 굳이 역사적인 사실을 고증하지 않고 중국 선종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선종의 이상을 상징하는 달마의 전기 속에서나, 혹은 더 나아가 선종 중에서도 노장사상 등 중국사상이 많이 섞여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선종에서 말하는 禪(선)은 단순히 인도불교의 禪定(선정)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중국사상에 의하여 배양되고 발전된 것으로서 인도적 사유와 중국적 사유가 합쳐진 사상이며, 동양사상의 위대한 정수가 발휘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종은 의연히 불교의 종교철학상의 기본적 입장을 계승하여, 세계의 객관적 진실성을 부인한다. 따라서 인간의 정상적인 인식작용을 부정해 버렸다. 선종에서 뒤엎어진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하는 것, 즉 객관세계의 존재를 부정함은, 인간에게 정상적인 인식 능력이 있어서 객관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객관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선종의 철학체계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객관세계가 주관적 인식과 일치하지 않을 때, 禪(선)은 객관세계를 수정하는 방법에서 주관적 인식으로 전환한다. 진여는 가장 완전하고 원만한 주관적 정신[本心(본심)]이기 때문에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종의 이와 같은 특성은 승조가 논구했던 動靜相卽(동정상즉)·體用合一(체용합일)·主客一致(주객일치)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며, 선사들의 어록을 통해 상관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論題(논제)에서 '僧肇 自然觀(승조 자연관)'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事物(사물)에 대한 僧肇(승조)의 思想的(사상적)인 觀點(관점)이나 哲學的(철학적)인 見解(견해)를 통칭한 것이다.

Ⅱ. 禪師들에 의한 僧肇 動靜相卽觀의 受容

僧肇(승조)가 '物(물)'이라고 말할 때에는 단순히 물질적 존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중국사상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물질적 존재 외에 사람과 그 밖의 事象(사상)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物(물)이라는 말 대신 '象(상)', '法(법)', '有(유)'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物물)의 본질이 '虛(허)'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모든 物(물)은 因緣(인연)으로써 성립되기 때문에, 만물은 有라고도 말할 수 없고 無라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만물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인연을 기다려서 비로소 화합하여 임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는 참된 有가 될 수 없고 임시로 有라는 이름이 붙을 뿐이다.

또한 모든 존재는 無가 될 수도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생명이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물은 有라고도 無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다만 인연에 의하여 성립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하게 된다. 즉, 物(물)은 非有非無的 存在(비유비무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物(물)의 본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虛(허)'라고 하였다.

승조는 [物不遷論(물불천론)]에서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모두 변화한다고 하는 세속의 상식을 타파하여, 언뜻 보기에 '不遷(불천)'은 표면상 '無常(무상)'에 정면 대립하는 것 같으나 진리의 세계에는 변화!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특히, 動靜(동정)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통하여 논증하였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찾는 데 어찌 움직임을 버리면서 고요함을 구하는가? 반드시 모든 움직임에서 고요함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모든 움직임에서 고요함을 찾기 때문에 비록 움직이지만 항상 고요하다. 움직임을 버리지 않고 고요함을 찾으므로 비록 고요하지만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 이와 같다면 움직임과 고요함이 처음부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미혹한 범부들은 動(동)과 靜(정)이 동일하지 않다고들 한다.


승조는 움직임과 고요함, 운동과 정지현상이 분리되어 고유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는 상식적인 견해에 전적으로 반대하며, 운동 속에서 정지를, 정지 속에서 운동을 보아야 한다고 논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은 옛것이 지금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움직임이라 하고, 고요하지 않다고 한다. 내가 말하는 고요함 역시 옛것이 현재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고요함이라 하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움직임과 고요함은 실체성을 지양하고 서로 의존하는 현상이 되므로, 움직임의 체험과 고요함의 관조를 더하고 이와 동시에 지혜의 영역을 초월하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승조는 體用(체용) 두 면이 바로 녹아들어 하나가 됨을 나타낸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움직이며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은) 현재로 오지 않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사물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라고 한다. 이어서 승조의 이와 같은 견해가 이후 선사들에게 어떤 식으로 투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달마가 중국에 오기 전, 당시 중국에는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존경을 받던 傅大士(부대사;497 569)가 있었다. 본명은 傅翕(부흡)인데, 무州善慧 大士(무주선혜 대사)라고도 불린다. 浙江省 義烏(절강성 의오)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생각이 예리하였다. 24세에 嵩頭陀(숭두타)에게 感悟(감오)하여 松山(송산)에 숨어서 수행하다가 雙林樹(쌍림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性淨(성정)을 체득한 후 산속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다음 인용문은 그가 남긴 유명한 게송으로, 중국 선사들이 갖고 있는 객관세계에 대한 관점을 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善慧大士語錄(선혜대사어록)}뿐만 아니라 여러 禪書(선서)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빈손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호미가 내 손에 있다.

나는 걸어간다.

그런데도 나는 소 등에 타고 있다.

소가 다리 위를 지나간다.

물은 흐르지 않고

다리가 흘러가고 있다.


부대사의 게송 중 위의 게송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바람이 세차도 나무를 움직일 수 없고

북을 두드려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해가 떠도 나무에 그림자가 없고,

소는 물 위를 지나간다.


가 있다. 빈손으로 가고 있었는데 손에 호미가 있다는 것은, 바로 不空(불공)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게송에서 말하려는 空(공)은 초월의 空(공)이다. 즉, 不二(불이)의 정신을 표현하는 空이다. 이미 걷고 있는데 다시 소를 탄다는 것은, 自他(자타)를 초월한 能所不二(능소불이)의 정신이다. 여기에서 게송의 상황을 상식에 맞춰 말한다면,

'물은 흘러도 다리는 흐르지 않는다.', '강한 바람은 당연히 나무를 흔든다.', '북을 치면 당연히 소리가 들린다.', '해가 뜨면 나무의 그림자도 따라 움직인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위의 게송은 반대로 말하고 있어 마치 괴변을 늘어놓은 것 같다. 바로 움직여야 하는 것은 도리어 조용히 있고,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은 도리어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서 진정 말하려고 하는 것은, 動靜(동정)을 초월하여 둘이 아닌 경지이다. 3조 僧璨(승찬;? 606)은 信心銘(신심명)에서,


움직임을 멈추면 움직임이 없고, 그침을 움직이면 그침도 없다.

둘 다 이미 이룰 수 없는데, 하나인들 어찌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만약 動(동)이나 靜(정)이 별개라고 생각한다면, 곧 이미 相(상)에 집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動靜(동정)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둘 다 대치하지 않는 圓融無碍(원융무애)인 것이다. 이처럼 바야흐로 동정을 초월하고 망심조차도 생겨나지 않는다면, 설사 動(동)이라고 해도 靜(정)과 같게 된다. 6조 혜능(638 713)의 法寶壇經(법보단경)에서는,


(혜능이) 광주 法性寺(법성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마침 印宗法師(인종법사)가 {涅槃經(열반경)}을 강의하던 참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떤 승려는 바람이 분다고 하고, 또 다른 승려는 깃발이 나부낀다고 하며 논의가 그치지 않았다. 혜능이 나아가 말하였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니며, 깃발이 나부낀 것도 아니니, 여러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네."


라고 하였다. 위의 게송대로 마음에는 여러 가지 현상이 생길 수 있는데, 우주 만상 모든 것은 자기 마음속에 나타나는 幻相(환상)이다. 그래서 萬法(만법)이 모두 자기 마음에 속한다는 것이다. 現象界(현상계)에 근거해서 말한다면, 바람이 불고 깃발 또한 나부끼는 것이다. 본체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나부끼는 것도 아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바람이 불지도 않고 깃발이 흔들리지도 않게 된다. 마음의 본체가 無染無執(무염무집)이라는 것을 알면, 바람이 불고 깃발이 나부낀다고 하더라도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득하게 된다. 動靜(동정)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바로 동정을 초월한 상황이다. 승조는 物不遷論(물불천론)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旋嵐(선람) 의 바람이 수미산을 무너뜨린다 할지라도 항상 고요하며, 江河(강하)가 다투기나 하듯이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해도 흐르는 것이 아니고, 봄날의 아지랭이[野馬(야마)]가 나부끼며 올라간다 해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해와 달이 하늘을 지나간다 해도 우주를 한 바퀴 돈 것은 아니다.


승조가 말한 요지는, 萬物(만물)이 虛寂(허적)하다는 道理(도리)와 諸法(제법)의 本性(본성)이 空(공)하다는 뜻을 천명하는 것이다. 또한 卽動卽靜(즉동즉정)의 뜻을 드러내고, 動靜(동정)이 둘이 아니라는 정신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초기 선사들은 항상 '물은 흐르지 않고 다리가 흐른다[橋流水不流(교류수불류)].'를 公案(공안)으로 삼았다. 이는 다리는 흐르지 않아도 물은 흐른다는 상식적인 입장을 전환시킨 것으로, 의식 이전의 경계, 즉 자기의 분별 지각을 초월한 그 이전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승조의 [物不遷論(물불천론)]에 설해지는 관념은 문헌적으로 위의 공안에서 밝히는 것보다 선구적이다. 이러한 절대 정신의 전개는 선종 참선의 화두와 깨달음의 도리를 밝히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중국 선종의 참선과 화두는 모두 승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虛堂集(허당집)에


妙有(묘유)와 不有(불유), 도대체 태양과 불꽃처럼 억지를 쓸 수 있는가.

眞空(진공)과 不空(진공), 어떻게 선람의 바람이 산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라고 설해지는데, 앞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汾陽無德禪師語錄(분양무덕선사어록)과 虛堂和尙語錄(허당화상어록)에서는 직접 [肇論(조론)]을 인용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韓侍郞(한시랑)이 한 승려(無德禪師;무덕선사)에게 물었다.

"제가 들은 바로는 大德(대덕)께서 肇論(조론)을 강의한다던데, 그렇습니까?"

"분수에 맞게 문자를 읽는 정도지요."

"肇論(조론)에는 四不遷(사불천)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侍郞(시랑)이 찻잔을 던져 깨뜨리며 말하였다.

"이것은 遷(천)입니까, 不遷(불천)입니까?"


韓文公(한문공)이 승려에게 물었다.

"들은 바로는 肇論(조론)에 대한 강의를 한다던데,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肇論(조론)에는 四不遷(사불천)이 있다던데,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공이 찻잔을 던져 깨뜨리며 말했다.

"이것은 遷(천)입니까, 不遷(불천)입니까?"

승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韓侍郞(한시랑)과 韓文公(한문공)은 동일인으로 韓愈(한유)를 말한다.

한유가 汾陽(분양)의 무덕선사를 방문했을 때, 일찍이 승조의 [肇論(조론)]을 강의한 적이 있는지에 관하여 물었다. 선사는 그렇다고 했다. 다시 거듭 肇論(조론) 안에는 四不遷(사불천)-[物不遷(물불천), 境不遷(경불천), 時不遷(시불천), 因果不遷(인과불천)]-이 있냐고 물었더니, 선사가 있다고 하였다. 한유가 찻잔을 던져 깨뜨리면서, 이러한 모습이 遷(천)인지 不遷(불천)인지를 물었다.

여기에서 無常說(무상설)에 의해서 대답한다면 당연히 '遷(천)'을 말해야 하지만, 無常(무상)에 집착하여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 '不遷(불천)'이라고 해야 한다. 결국, 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조가 제기한 遷(천)과 不遷(불천)의 개념이 唐代(당대) 사람들의 화두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화이다.

승조에 의해 본격적으로 거론된 動靜(동정)의 문제가, 이후 선사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湯用동(탕용동)은 승조의 중요 논리, 예컨대 是非(시비)를 평등하게 하고 動靜(동정)을 하나로 아우르는 사유법이, 아마도 장자를 읽고 얻은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하였다.

Ⅲ. 中國的 思想 傳統인 體用 論理의 展開

중국 불교사상가들은 인도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완전히 새로운 형이상학에 대한 사색과 실천의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적인 불교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전개는, 승조에 의한 '體用(체용)'논리의 수용 및 전개에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위진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 사상사에는 여러 학파의 異說(이설)들이 어지럽게 일어나 서로간의 논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완전히 정리할 수도 없는 듯하지만, 그들 논쟁의 중심은 '體用(체용)'의 관념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玄學(현학)은 물론 외래 사상인 불교학도 한결같이 無(무)를 귀하게 여기고 有(유)를 천하게 여기는 입장에서, 無를 本(본)으로 삼고 有를 末(말)로 삼았다.

本末(본말)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體用(체용)의 뜻이다. 승조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體에 입각한 用, 用(용)에 입각한 體(체)라는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體用(체용)'이라고 함은 본체론적인 생성 또는 변화의 관념이 주체적인 실천의 입장으로 옮겨 간 것이다. 그것은 원인을 결과에 근거해서 찾지 않고, 모든 현상을 근본적인 것의 운동이라고 보는 태도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것이 현상 밖에 정지한 實在(실재)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변화의 주체라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현상의 모든 것을 본체적인 無(무)의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승조의 경우 진리가 현실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을 그렇게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적인 자세를 無(무)라는 주체에서 찾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것은 승조의 자연관이 특수한 중국적 명상과 관조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다.

선종에서는 현실세계의 물질적 존재가 모든 현상의 기초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중을 현혹하고 마비시키기 위해 현상과 본질과의 관계를 허구화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철학에서의 體(체)와 用(용)의 문제는 현상세계의 배후 또는 위에 현상세계의 근거가 되는 한층 기본적인 기초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從容錄(종용록에는 {維摩經(유마경) [觀衆生品(관중생품)] 중 문수사리와 유마힐의 문답에 대한 승조의 주석 몇 부분이 게재되어 있다.


肇公(조공)이 注[注維摩經(주유마경)]에서 말하였다.

"心(심)은 물과 같아 靜(정)에는 곧 비침이 있고 동에는 곧 비침이 없다. 癡愛(치애)는 흐려지고, 삿된 바람에 흔들린다. 솟아나는 파도는 흔들려서 처음부터도 잠시 머물지 않는다. 이 관법으로 어떻게 해야 전도되지 않겠는가. 비유하면, 면전에서 솟아나는 샘처럼, 스스로를 책망하여 근본을 형언하는 것은 없었던 바이다."

또 말하였다. "마음의 움직임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因(인)이 있게 되어 서로 생하게 된다. 이치의 궁극에서도 움직임이 시초라면 되풀이해서 근본은 없게 된다."

또다시 말하였다. "無住(무주)이기 때문에 倒想(도상)이며, 도상이기 때문에 분별이고, 분별이기 때문에 탐욕이며, 탐욕이기 때문에 有身(유신)이다. 이미 유신인 이상 선악을 나란히 밝혀야 하고, 선악이 이미 밝혀진 이상 만법이 이처럼 일어나며, 이로부터 기왕에 數(수)는 다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肇公(조공)은 최초로 動念(동념)의 근본이 不覺(불각)이라고 하고, 無住(무주)의 본으로 삼았다.


승조의 注維摩經(주유마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은 물과 같아서 물이 정지해 있으면 더 이상 파도가 출렁이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고요해지면 만물을 심오하게 비출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물이 움직이면 큰 파도가 일어 빈 곳을 덮치는 것처럼, 마음이 움직이면 바로 오염되므로 정체되어 있는 것을 밝힐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癡·愛(치·애)로 덮여 있어, 邪道(사도)를 正道(정도)로 오인하곤 한다. 마치 물살의 용솟음이 넓고 클 경우, 잠시도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도리로 萬事(만사)를 체득한다면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될 것이다. 마치 맑은 샘물에 얼굴은 비출 수 있으나, 물 속에 비친 얼굴은 환영일 뿐 진짜 사림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因(인)'의 執相(집상)을 내는 것이다.

사실 心體(심체)는 분명히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지, 티끌만한 所緣(소연)에 의해서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속세인의 마음은 원숭이나 말과 같아서, 이리저리 떠돌 뿐 영원히 멈추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顚倒(전도)·分別(분별)·貪欲(탐욕)·善惡(선악) 등의 번뇌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듯 여기에서는 萬事萬物(만사만물)을 이끌어 내어 무궁무진에 이르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승조는 최초 一念(일념)에 대하여 집착할 수 없다고 제창하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또 無念(무념)을 宗(종)으로 삼고 無住(무주)를 本(본)으로 삼아, 안으로 空(공)에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도 相(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비로소 心性(심성)의 體用合一(체용합일)이 체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혜능도,


나의 이 法門(법문)에서는 위에서부터 지금까지, 먼저 無念(무념)을 宗(종)으로 삼고 無相(무상)을 體(체)로 삼으며 無住(무주)를 本(본)으로 삼았다.


라고 하여, 승조의 견해를 충실하게 계승하였음을 보여 준다.

승조에 의해 전개된 體用論(체용론)은 중국사상적인 바탕을 충실히 계승하되, 인도불교나 중국사상에도 일찍이 없었던 독자적인 논리로서, 중국불교 여러 종파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승조의 체용론은 육조 말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의 출현에 이르러 眞如(진여)의 體相用(체상용)이라고 하는 三大(삼대)의 선구사상이 되었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래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의 진여는 사람들 마음의 근원적인 존재 방식을 진여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는 승조가 사용하던 '本無(본무)' 개념에 대한 이해의 심화로서, '있는 그대로'의 뜻으로 올바르게 '如(여)'라고 번역되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唐代(당대)의 화엄철학자들은 이것을 현상세계의 근원에 있던 절대적 一者(일자)라고 생각하여, 현상을 그것의 움직임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며,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진여의 이해 위에서 마침내 중국 선종이 형성될 수 있었다.

Ⅳ. 인도 수행의 中國的 變換

涅槃(열반)은 석존시대 이래 수행의 궁극이자 선정의 목적이었다. 승조는 이것을 받아들여 해석하되 중국사상적 전통을 적절히 계승하여 '物我同根 萬物一體(물아동근 만물일체)'의 개념으로 바꿔 놓는다. 여기에서 "반야는 有(유)에도 있지 않고 無(무)에도 있지 않다"라고 하는 中論(중론)의 주장이 거의 그림자를 감추고 있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로 '物我同根 萬物一體(물아동근 만물일체)'의 사상은 멀리 莊子(장자)의 齊物論(제물론)에서 비롯한다.

승조는 이것을 불교 명상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인도적인 열반을 궁구하는 수행이 이렇게 해서 物我同根(물아동근)의 달관으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불교에서 보면 매우 주체적이지만, 중국 전통 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노장적인 변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언어나 사유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 그 자체의 변화이다. 肇論(조론)의 전체를 통하여 인도적인 열반이나 반야바라밀의 내용이 노장적인 無(무)로 格義(격의)되고, 노장적인 無(무)가 인도적인 명상에 의하여 국면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전해지고 있는 바에 의하면, 羅什(나집)과 僧肇(승조), 동문인 慧觀(혜관)도 모두 老子(노자)의 注(주)를 썼다고 한다. 그들이 인도불교를 중국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노장]의 용어나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가 현저하게 중국화되었다. 이러한 자아 주체의 명상과 현학은 중국 선가에서 특별히 중시되고 있다. 그래서 승조는 선종사상의 초석이자, 그것을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승조의 이러한 노력이 선가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石頭希遷 (석두희천;700 790)은 俗姓(속성)이 陳氏(진씨)로 廣東省 端州(광동성 단주) 출신이다. 조계에 이르러 6조혜능에게서 득도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혜능이 입적하자 靑原行思(청원행사)에게 參學(참학)하였다. 天寶 年間(천보 연간;742 756) 초기에 衡山(형산)의 南寺(남사)에 가서 그 절 동쪽 石上(석상)에 암자를 짓고 항상 좌선하였으므로 석두화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五燈會元(오등회원)에,


선사 (희천)는 {肇論(조론)}을 보다가 '萬物(만물)을 모두 모아 自己로 삼은 자는 오직 聖人(성인)일 뿐이리라.'에 이르렀다.

선사는 이에 (손뼉을) 몇 차례 두드리고 말하였다.

"聖人(성인)에게는 자기가 없으므로, 자기가 아닌 것도 없다. 法身(법신)은 無象(무상)인데, 누가 自他(자타)를 말하겠는가? 둥근 거울에 재빨리 비치는 그 사이라도 만상의 體(체)는 오묘해서 스스로 나타난다. 境(경)과 智(지)는 하나가 아닌데, 누가 去來(거래)를 말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萬物(만물)을 모두 모아 自己(자기)로 삼은 자는 오직 聖人(성인)일 뿐이리라.'의 의미는, 득도한 사람은 '나'라고 하는 것도 없으므로 만물과 일체가 되며, 만물 일체가 바로 '我(아)'가 되는 것으로, 곧 성인의 경계라는 말이다. 희천은 이 글을 깊이 체득하여 성인은 無我(무아)이므로 만물을 회통한다고 여겨 깊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參同契(참동계)]를 지었다고 한다. 이에 관하여 碧巖錄(벽암록)에도,


석두스님은 [조론]을 보다가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치고, 그 뒤 [參同契(참동계)]를 저술하였는데, 그 또한 이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희천이 肇論(조론)을 읽다가 '萬物(만물)을 모두 모아 自己로 삼은 자는 오직 聖人(성인)일 뿐이리라.'에 이르러, 聖人성인(佛陀;불타)과 萬物(만물)이 화합하고, 主(주)와 客(객)이 서로 주고받으며,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고, 깨달음은 매끄러우면서도 일정한 규칙이 없음을 깨달았다.

법신은 형도 상도 없고, 나와 남의 분별도 없다. 단지, 冥心의 절대가 있고, 圓融觀照(원융관조)만 있을 뿐이다. 萬物(만물)의 現象(현상)을 체험할 수 있어야 비로소 自他(자타)의 분별이 없어지게 되고, 外境(외경)과 자기 안에 비치는 것이 원래 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 事物(사물)은 또한 오고감도 변천도 없다. 희천은 [조론]을 읽으면서 시사받았기 때문에 禪宗(선종)에서 말하는 得道(득도)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제종의 初祖 義玄(초조 의현;? 867)은 俗姓(속성)이 荊氏(형씨)로 하남성 曹州 南華(조주 남화)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히 총명하여 재기를 나타냈고, 성장해서는 효행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불교에 마음을 두고 출가한 뒤 여러 방향으로 參學(참학)하였는데, 후에 希運禪師(희운선사)를 만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 眞定府(진정부)의 臨濟院(임제원)에 주석하였기 때문에 세인들은 그를 임제라 칭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임제록이 있는데, 여기서는 主客一致(주객일치)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나타내려 하였다.


道流(도류)여!

佛法(불법)에는 어디에도 用(용)과 功(공)이 없다. 단지, 특별한 일 없는 평상일 뿐이다. 대변 보고 소변 보며, 옷 입고 밥 먹으며, 졸리면 곧 눕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보고 웃는다. 智(지)가 바로 知(지)인가?

옛사람이 말하였다.

"밖을 향하여 노력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둔한 자이다. 그대가 또한 어느 곳에서나 주체가 된다면, 서 있는 곳이 다 참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체의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고 청정하다면, 일체의 모든 행동이 깨달음 그 자체라는 말이다. 주체된다는 것은 平常無事(평상무사)에 보다 철저해진다는 뜻이다. 禪家(선가)에서 말하는 成佛(성불)은 다 主觀 精神(주관 정신)의 초탈에 있다고 하여 客觀 形象(객관 형상)에 집착하지 않았다. 특별히 구하는 바 없이 자유로운 일상의 평범함이 그대로 佛法(불법)이며, 나날의 생활이 그대로 불법이라는 것이다.

일상의 평범 속에서 누리는 마음의 순일함이 그대로 불도이며, 어떤 것도 보탤 필요 없이 나날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불법의 체험이라는 뜻이다. "어느 곳에서나 주체가 된다면 서 있는 곳이 다 참되다."는 말은 곧 주체가 특히 중요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僧肇(승조)가 [不眞空論(부진공론)] 말미에서 말한 바 있다.


眞際(진제)를 떠나지 않고 모든 법이 건립할 처소를 삼았기 때문에 제법을 건립한 곳이 바로 진제인 것이다. 이와 같다면 道(도)가 멀다고 하겠는가? 부딪치는 일마다 진제인데, 성인이 멀다고 하겠는가? 체득하면 바로 신령해지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자아의 주체가 바로 만법의 의지처이다. 아무리 자기 자체를 버린다 해도 다른 곳에 의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만법의 의지처라는 것은 不變(불변)의 자아 주체이다. 그래서 '道(도)'는 사람이 멀지 않고 일상과 사물 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아 주체 안에 드러난다. 자아 주체와 세간법은 서로 방해하지 않고 원융하며, 서로 도와 준다.

"도가 멀다고 하겠는가? 부딪치는 일마다 진제이다."라고 함은, 眞體(진체)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아 안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주와 객이 서로 화합하고 도와 주는 것은 바로 정신의 주체이다. 이런 현상은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의 존재를 배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진여 본체의 관점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것은 중국불교의 특질이자, 선종이 펼쳐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臨濟宗 楊기派(임제종 양기파)의 환悟克勤 (환오극근;1063 1125)은 속성이 駱氏(낙씨)이며, 彭州(四川省) 嵩寧 출신이다. 南宋의 高宗으로부터 환悟, 北宋의 徽宗으로부터 佛果라는 호를 받았다. 澧州(湖南省 澧縣) 夾山 靈泉院에 머물면서, 雪竇重顯 (설두중현;980 1052)의 [雪竇頌古(설두송고)]를 문인에게 제창하고 垂示(수시)·著語(저어)·評唱(평창)했는데, 문인들이 이것을 모아 碧巖錄(벽암록)을 엮었다. 기거하던 절의 방 안에 '碧巖(벽암)' 두 字(자)가 쓰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이 때문에 碧巖錄(벽암록) [碧巖集(벽암집)]이라 하였다. 이 벽암록의 73칙 馬祖百非(마조백비)에,


설법하는 자는 말도 없고 보여 줌도 없으며,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 설법을 함에 말함도 없고 보여 줌도 없으나 어찌 설법하지 않는 것과 같겠으며, 법문을 들음에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으나 어찌 듣지 않는 것과 같겠는가? 말함도 없고 들음도 없으니,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라고 설해지고 있다.


이는 말 있는 것과 말 없는 것의 경계를 뛰어넘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僧肇(승조)는 유마경의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말함이 없다는 것이 어찌 말하지 않음이겠는가? 설한 바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이다. 들음이 없다는 것이 어찌 듣지 않음이겠는가? 들은 바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이다. 설한 바가 없음은, 종일 설하였지만 아직 설하지 못한 것이다. 들은 바가 없음은, 종일 들었지만 아직 듣지 못한 것이다.


이른바 '말함이 없다.'는 것은 한마디도 안 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말하는 법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들음이 없다.'는 것은 귀를 틀어막고 한마디도 듣지 못하는 이처럼, 듣는 법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하루 종일 법을 설한다 해도 법을 설한 적이 없게 되는 것이다. 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 종일 법을 듣는다 해도 들은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절대 진리이자 無說無聞(무설무문)이다.

佛法(불법)은 언어나 듣는 것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言敎(언교)에 의해 강의하고 있지만,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도리어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치적으로 생각한다면, 생각을 뛰어넘어 말도 필요 없이 마음에 의해서만 아는 것은 없다. 곧,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현상이 아니다.

從容錄(종용록)과 空谷集(공곡집)에서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涅槃無名論(열반무명론)]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조공의 [涅槃無名論(열반무명론)]에, "석가는 마갈타국에서 방문을 걸어 잠갔고, 淨名(정명)은 비야리에서 입을 다물었다. 수보리가 설법 없음을 唱導(창도)하여 도를 나타내자, 釋梵(석범)은 설법 듣는 것이 단절된 것으로써 꽃비를 내렸다. 이들 모두는 이치를 정신으로 거느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입이 말이 없었던 것이다. 어찌 논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논변으로는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석가가 방문을 잠갔다.'는 것은 처음 성도하여 21日을 사유에 잠겨 설법하지 않으신 것을 말한다. '정명이 입을 다물었다.'는 것은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不二法門(불이법문)에 대해 묻자 유마거사가 말이 없었음을 말한다. 또 수보리가 바위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제석천이 꽃을 흩뿌리면서 '반야를 훌륭하게 설법하시는군요.'라고 말하였다.

즉, 수보리는 설법 없는 것으로써 설법을 하였고, 제석천은 들은 것 없이 설법을 들은 것이다.

절대의 진리는 자기 안에서 드러나고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귀로 듣는 것도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며, 다만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비추는 것이다. 승조가 이미 표현한 바 있는 '忘言(망언)'과 '絶慮(절려)'의 관념은 후대 선사들이 항상 사용하는 말이다. 碧巖錄(벽암록)에서는,


陸亘大夫(육긍대부)가 南泉禪師(남천선사)와 대화하는 즈음에 육긍대부가 말하였다.

"조법사는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하였는데, 매우 이해하기 어렵군요."

남전이 뜨락에 핀 꽃을 가리키며 대부를 부르더니 말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이 한 포기의 꽃을 마치 꿈결에 보는 것과 같이 하느니라."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從容錄(종용록)에 실려 있는 評唱(평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육긍대부는) [조론] 속에서 누비었는데, [涅槃無名論(열반무명론)] 第七 妙存篇(묘존편)의 다음 부분까지였다.

"玄道(현도)는 妙悟(묘오)에 있고, 妙悟(묘오)는 진실에 나아간 데 있으며, 진실에 나아가면 有·無(유·무)를 일제히 관찰하게 된다. 有·無(유·무)를 일제히 관찰하게 되면 상대방과 자기가 一體(일체)가 된다. 그 때문에 천지는 나와 한 뿌리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천지가 나와 동일하다면 상대적인 有·無(유·무)가 아니겠지만, 나와 다르다면 有·無(유·무)를 하나로 회통하는 데서 어긋나게 된다. 그 때문에 有·無(유·무)를 벗어나지도 않고 거기에 있지도 않은 그 사이에 玄道(현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南泉(남천;748 834)은 唐 池州(당 지주) 南泉山(남천산) 普願禪師(보원선사)를 말한다. 처음에는 嵩嶽 會善寺(숭악 회선사)의 暠律師(고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法相(법상)과 三論(삼론) 등을 수학했으나, 玄機(현기)는 경론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馬祖道一(마조도일)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고 한다. 삼론을 수학하였다 하니, 肇論(조론)을 즐겨 읽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貞元(정원) 11년(795)에 지양 남전산에서 선원을 열어 사립을 쓰고 소를 치며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밭을 일구면서 선풍을 펼쳤는데, 30년 간 한 번도 하산하지 않았다고 한다. 文宗 太和(문종 태화) 연간 초에 前太守(전태수) 육긍대부가 남전을 참방하여 스승으로 모셨다.

남전선사는 사람이 꽃을 보면 꿈과 같고, 경계가 바로 식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며, 밖의 환상은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객체와 주체가 서로 화합됨을 표시한다. 승조는 이러한 때의 정신 경계는 주관의 생각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객관의 경계는 주관의 생각과 서로 상즉상융하여 갈라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주관이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밖의 객진에 의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만약 현상이 바로 본체라는 경지를 체험할 수 있다면, 무와 유는 雙遣(쌍견)이고 나와 남은 서로 잊어버리게 된다. 즉, 만물과 나는 합일이며, 주와 객은 하나가 된다. 다시 말해서, 같은 점에서 본다면 유와 무는 서로 玄冥하는 것이고, 다른 점에서 본다면 사물은 서로 통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절대의 진리는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양쪽 편에 떨어지지 않는 중도이다.

Ⅴ. 結語

승조는 羅什(나집)이 역출한 中論(중론) · 百論(백론) · 十二門論(십이문론)의 대승 중관사상을 전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론]의 논술방식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긍정적인 논술방법을 사용하였다. 인도의 용수보살은 부정적인 논증방식을 통하여 모순을 지적해서 논파했는데, 다시 새로운 증명을 세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破邪(파사), 즉 顯正(현정)이기 때문이다.


승조는 용수보살이 항상 사용하는 四句否定(사구부정)의 형식도 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논파 이후에 아무것도 세우지 않는 현정도 아니다. 그는 논지에 맞게 아주 뚜렷하게 명제를 세우고, 그 주장에 맞는 근거를 세웠다.

승조가 [조론]을 지은 의도는 현학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반야학이 편벽되어 있던 점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즉, 불교학이 독립적으로 정확하게 방향을 되찾게 하고 싶어서였다. 승조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용수보살의 중관사상에서 나왔지만, 중국사상계의 현학적인 바탕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논술 표현상 부정의 논증방식을 완전히 떨쳐 버린 채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긍정논증법을 택하고 있다.

인도불교를 받아들이되, 그 속에 번거롭게 반복된 문장을 다 생략하여 간단한 표현으로써 중국인에게 적합한 논리로 중국화하였다. 또 체계적으로 불교의 이치를 소개하고 바로잡아 玄學式(현학식)의 불교학을 현학에서 분리시켜 중국사상계를 이끌 주된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용수보살이 자신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논증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언어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조가 용수보살의 논증방식을 따르지 않고 긍정적으로 논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中論(중론) 등 三論(삼론)은 모두 다 파사현정을 주장하고 있는데, 본래 그 正面 主張(정면 주장)이 있지, 단지 논파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째, 그대로 답습한다면 부정적인 논증방식으로 설해지고 있는 삼론이 이미 중국에 번역·유행되었기 때문에, 인도사상의 복사일 뿐 중국적인 중관사상의 발전을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셋째, 中論(중론) [觀四諦品(관사체품)]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二諦(이제)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世俗諦(세속제)로써, 둘째는 第一義諦(제일의제)로써'에서도 볼 수 있듯이, 第一義諦(제일의제)는 비록 言語道斷(언어도단)·心行路絶(심행로절)이지만 언어에 의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다.

어미 변화나 접사 등이 없는 고립어인 중국어로는 부정의 논증방식이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관념을 표현하기에만 적당한 중국어로는 긍정적인 논증으로써 제일의제를 직접적으로 논하는 방식이 오류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긍정적인 논증방식을 택하고 보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에 있어서는 과감한 생략과 비약을 피할 수가 없다. 생략되고 비약될 수밖에 없는 경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중국적인 체험적 직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선종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禪宗(선종)에서는 그 시조로 육조 말기에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達摩大師(달마대사)를 든다. 그러나 선종은 인도에 기원을 두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체험적 직관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전통에서 생겨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불교를 중국식으로 다시 체계화하고, 중국인에게 맞는 논증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승조가 선종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승조가 말한 '物我同根 萬物一體(물아동근 만물일체)'는 선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선사들은 흔히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내마음이다, 세상 만물·객체와 주체·부처세계와 세속세계·일월성신, 그리고 산하대지 모두가 내 마음의 변화물이며, 내 마음이 없으면 온갖 상전벽해의 세상사나 일월성신 따위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선사들이 중생들에게 추구하도록 요구했던 것은, 바로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고 마음이 곧 부처인 세상에서 초연하게 속마음을 굳게 지키는 경계였다. 여러 禪書(선서)에서 승조의 저술을 인용하여 선사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종의 선사들은 우주만물에 대한 僧肇(승조)의 思想的(사상적)인 觀點(관점)이나 哲學的(철학적)인 見解(견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