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기타

양자물리학 소개

별꽃바람 2012. 10. 14. 14:30

개인적으로 아끼는 동영상중에 하나입니다.

내용이 제목처럼 매우 어려워 몇번을 봐야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여 볼만한 내용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보시기를 권합니다. 댓글로 동영상을 요청하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자막을 아래에 써 놓았는데 너무 길어 읽기 불편할 겁니다. 첨부 파일을 프린트하여 찬찬히 읽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첨부파일 양자물리학 1편 자막.hwp

 

첨부파일 양자물리학 2편 종합 자막.hwp


1편은 물리학자나 신경생리학자, 의학자.신학자,철학자들이 모여 양자물리학의 기본법칙과 뇌신경생리학적 사실과 '의식의 본질'에 대해 말한 내용입니다.

2편은 좀더 심도있는 양자역학과 (뇌)신경생리학 이야기와 더불어 역시 '의식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What The Bleep Do We Know

               대체 우리가 아는 것은 뭐란 말인가

 

 

 

             Down the rabbit hole 1  토끼굴 아래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 우리를 가장 가슴 뛰게 만든단다."

 

        

             

              Down the rabbit hole 2

 

"우리는 결코 그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환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싫어하는 이유들이 있는 상황 속으로 환생합니다."

 

 

 

 

 

양자물리학과 의식의 본질 

1편 녹취록

양자물리학 1편 자막 내용

 

모든 하나님들에게(_ _)(_ _)(_ _)

 

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뇌는 외부에서 인식하는 것과 스스로 기억하는 것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계속 실재한다고 인식할까요. 세상이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자아가 만질 수도 없다면 말이죠.

 

모든 현실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들이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여러분이 다른 존재가 되어 여러분을 바라본 적이 있나요? 그리고 완전한 관찰자로서 여러분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어디서 왔고…….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그것이 궁극적인 질문 아닐까요? 현실은 무엇인가요? 예전엔 제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떤 점에서 현실보다 훨씬 더 현실적입니다. 사람들은 비현실이라고 말하지만 말이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을 설명하려고 시간을 투자하면 할수록 신비의 굴속에서 길을 잃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이 양자 물리학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놀랍고 신비해집니다. 양자 물리학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가능성에 관한 물리학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나타납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문제죠. 우리가 세상을 느끼는 방식과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의차이의 문제입니다. 생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지금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바라보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문화가 잘못된 패러다임 위에 존재한다는 신호입니다.

 

즉 생각의 힘을 너무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죠. 모든 시대와 세대에서 만들어진 가정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지구가 평평하다든가 둥글다든가 하는 것이죠.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숨겨진 가정들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가정의 대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마도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당연히 여기는 것들이 맞지 않다는 좋은 지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너무나도 자주 이런 개념 속에 갇혀버립니다. 그것이 패러다임이죠. 현대의 물질문명은 사람들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특히 종교 역시도 그런 역할을 했죠. 하지만 여러분이 양자 물리학을 신중하게 검토해본다면 그 책임은 분명히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양자 물리학은 분명하고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물론 이 세계가 무한하고신비하다는 것을 알려 주긴 하지만 그러한 기계관은 정답은 아닙니다. 저도 답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스스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이 신비일까요?

모두가 수수께끼일까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를 더 깊이 물어보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삶을 더 즐겁게 해주죠. 삶의 진정한 요령은 앎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에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같은 현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걸까요? 같은 관계와 똑같은 일들을 왜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걸까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이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 위에서 왜 우리는 똑같은 현실을 계속해서 창조해내는 걸까요? 우리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선택권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우리가 일상에 익숙해져서, 즉 우리가 일상의 삶을 창조해 내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현실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외부의 세계가 우리 안의 세계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라는 사실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그 반대죠. 즉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외부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죠. 절대적으로 견고한 물리적 현실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물리적 현실이라는 것이 다른 물리적 현실의 조각보다 그 양이 증가할 때 현실로 나타난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다른 물리적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겠죠. 물론 우리는 이러한 움직임의 일부이구요. 하지만, 둘 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홀로 날아온 돌멩이라고도 볼 수도 있죠. 그래서 서로서로 복잡한 물질들이 반응해서 특정 존재의 상태로 나타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내가 돌부리를 걷어차면" "발가락이 아프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 아픔을 현실로 느끼고 생생하게 와 닿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경험이고 그 사람이 현실이라고 느끼는 인식입니다. 과학자들은 실험에서실험대상자에게 어떤 물체를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뇌를 컴퓨터로 PET 스캔했습니다. 그리고 뇌의 일정부분이 반응하는 것을 측정했죠. 그리고 다음에는 눈을 감게 한 뒤 똑같은 물체를 상상하게 했습니다. 대상자가 같은 물체를 상상하자 뇌의 같은 부분이 반응했습니다. 마치 실제 눈으로 그 물체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 실험은 과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주었죠. 보는 것은 누구인가? 뇌인가? 눈인가? 그리고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뇌로 보는 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눈으로 보는 것이 현실인가?

 

그리고 뇌는 주위에서 보는 것과 뇌가 기억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부분의 뇌신경망이 반응했기 때문이죠. 이 실험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집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수많은 정보에 폭격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정보들이 몸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그것들을 처리하는 것이죠.

 

그것들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거르고 걸러져서 각 단계별로 정보를 걸러내고 있는 것이죠. 결국 의식까지 올라오는 것들은 대부분 자기 보존을 위한 정보들입니다. 뇌는 초당 4천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 중 단지2000여 가지만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이 2000여 가지의 정보들은 대부분 몸과 주위환경 그리고 시간에 관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무한한 양자 물리학이라는 빙산에서 낡은 부분만을 보는 것이죠. 만일 뇌가 4천억 개의 정보를 처리하고 우리는 그중 2000여 개만을 인식한다면 현실은 뇌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뇌는 정보를 계속 받아내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합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눈은 렌즈와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뇌 뒤의 테이프라고 할 수 있죠. 시각피질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바로 이 뒤에 있죠. 그것은 마치 카메라와 테이프와 같습니다. 뇌가 볼 수 있다고 하는 것들만 뇌 안에 저장해둔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이 카메라는 제 주위의 것들을 더 많이 봅니다.

 

여기에 있는 것보다 말이죠. 왜냐하면, 카메라는 반대 의견이나 판단이 없기 때문이죠. 뇌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는 것들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이나 카메라가 뇌가 볼 수 있다고 투영하는 것 이상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뇌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만을 보는 것이죠. 우리는 조건화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과 맞는 패턴만을 연결시킵니다. 여기 그것에 관한 멋진 이야기가 있죠. 전 사실이라고 믿고요.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들이 카리브 해의 섬에서 콜럼버스의 배가 다가왔을 때 그들은 콜럼버스의 배를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는 그들이 전에 보았던 것들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죠.

 

콜럼버스의 함대가 섬으로 다가올 때 원주민들 중 어느 누구도 배를 볼 수 없었습니다. 배들이 수평선 위에 실제로 존재했음에도 말이죠. 그들이 그 배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의 뇌나 경험 속에 범선이라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술사는 바닷가에서 물결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지만 배는 볼 수 없었습니다. 주술사는 왜 물결이 일렁이는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매일 해변으로 나가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주술사는 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가 배를 보고 사람들에게 배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자 다른 원주민들은 그 주술사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창조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창조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실 속에서 결과를 창조해 냅니다. 우리는 항상 기억의 거울에 비춰보고 난 뒤에 그것을 인식합니다. 우리가 견고하고 거대한 갑판 위에 살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정답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과학에서 다루는 이런 문제들 역시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에서 우리는 항상 관찰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고 볼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뇌가 인식하는 것들에 의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뇌는 우리에게 사물을 인식하고 볼 수 있게 하죠.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단지 거대한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부에 있는 것을 보기위해외부로 나가는 길은 사라져버리죠. 우리의 뇌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과 뇌에서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밖에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동떨어진 '외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의 방향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멈추지 않는 양자 단계의 결과에 좌우됩니다. 우선 아원자 세계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 후, 그 아원자 세계가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아원자 세계에 대해 제가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건 작은 실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정신 나간 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란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조그만 실험으로 극히 짧은 시간에 제한된 공간에서 큰 에너지를 발견해내려고 하죠. 아원자의 영역에서는 그건 정말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리고 아원자물리학은 그 영역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해 내려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양자 물리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과학을 필요로 합니다. 양자 물리학은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관적인 가설들을 필요로 합니다. 도대체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생각, 감정, 직관들이 관련되리라는 것이죠.

 

물질은 우리가 오랫동안 그렇다고 생각해온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궁극적으로 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원자나 분자 안은 대부분이 공간이고 입자의 크기는 극히 작습니다. 원래의 분자나 원자의 크기에 비한다면 말이죠. 나머지는 진공입니다.

 

입자는 항상 존재와 소멸을 반복합니다. 그러면 소멸되었을 때 그 입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 문제는 다루기가 힘든 문제입니다.

 

제가 두 개의 답을 드리죠.

첫 번째 또 다른 우주로 간다. 그럼 그 우주에 사는 사람들은 똑 같은 질문을 하겠죠. 그들의 입자가 우리의 우주로 들어올 때 그 우주에 사는 사람들은 또 묻겠죠."어디로 간 걸까?" 시간의 방향에 관한 신비라고 하는 거대한 신비가 존재합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기본법칙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의 법칙에서 사용하는 미래를 바라볼 때 쓰는 인식론적인 관점이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과 다르다는 것이죠. 물리학의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수수께끼가 생깁니다. 왜 우리는 어떤 것은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과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직 미래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가 하는 것들 즉 과거와 미래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론의 관점과 지금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관점을 갖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원칙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제게는 이러한 문제를 덮어놓는다는 것은 문제의 3/4를 알지도 못한 채 시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주는 대부분비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비어 있고 물질은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우주는 전혀 물질적이지 않죠.

 

원자를 살펴보죠. 우리는 원자를 딱딱한 공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자는 중앙에 밀도가 높은 물질을 가지고 있는 작은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위는 전자가 무작위의 가능성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밀도가 높다고 생각하는 원자핵 역시 전자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비물질적인 물질들에 대해 우리가 가장 견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구체화된 정보조각 같은 것이죠.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나 개념, 정보들입니다. 그리고 말했듯이 닿지도 않는 답니다. 이 전자들은 충전이 돼서 닿기도 전에 다른 전자들을 밀어내죠. 그래서 아무것도 닿은 게 없는 거죠

 

우리가 시간의 앞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지 의식의 경험에 불과합니다. 양자 물리학에서 여러분은 시간을 거꾸로 올라갈 수도 있죠. 언제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요. 항상 의식적으로 끝없이 선택하는 것이죠.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관찰하면 입자처럼 보이죠.

 

관찰하지 않을 때는 가능성의 파동이 존재하고 관찰할 때는 경험의 입자들이 존재하죠. 우리가 견고한 것이라고 여기는 입자는 실제로는 '중첩'되어 존재합니다. 가능한 위치가 펼쳐지고 입자는 한 순간 모든 위치에 존재합니다. 조사하는 순간 입자는 가능한 위치 중 하나로 고정됩니다.

 

양자 중첩은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상태로 둘 이상의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아주 이상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양자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미 검증된 것입니다. 영웅은 세상이 우리가 선택할 때까지는 가능한 조각들로 존재한다는 중첩을 알고 있어요. 그중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다든지 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들이죠.

 

그리고 하나를 선택해 다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기도 하죠. 어떻게 시스템이나 사물이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물질을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우리는 주위의 사물을 내가 입력하거나 선택과는 별개로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대신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물질세계라 하더라도 의자들, 탁자들, 방들, 카펫, 카메라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의식의 가능한 흐름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흐름에서 순간순간 선택을 해서 나의 실질적 경험이 구체화 되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너무 중요하고 어렵기도 하죠.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경험과는 별개로 세계가 외부에 이미 존재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 물리학은 그 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양자 물리학의 공동 발견자인 하이젠베르그 자신도 원자는 물질이 아니라 단지경향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물을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사물들은 모두 의식의 가능한 형태들입니다. 미국에는 수많은 연구소가 있습니다. 그냥 눈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 사물들도 두 개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 사물을 사진으로 찍어 과학자들에게 보여주더라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여기 색깔이 멋있네. 여기도 있고 저기도 두 가지 무늬가 있군. 그게 뭐 대수야? 그것은 두 장소에 존재하는 똑같은 사물입니다.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죠. 제 말은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한다 거나 과학자들이 헷갈려 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신비로 와서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스타트랙 같은 영화를 보면"Beam me up, Scotty." (주- 공간이동을 할 때 쓰는 말) 그런 종류의 말이 나오지만 그게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여기서 하나의 물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설프게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어떤 일 때문에 화를 내고 점심을 먹고 마치 겉으로는 놀라운 어떤 일도 없는 듯이 집에 가고 또 삶을 영위합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지만 그렇게 사는 바로 우리의 눈앞에 놀라운 마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양자 물리학은 단지 가능성만을 계산해 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이면 누가 혹은 무엇이 이러한 가능성을 선택해서 경험이 구체화되는 사건들로 가져왔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순간적으로 의식의 문제가 개입됩니다. 관찰자가 무시될 수 없는 것이죠. 우리는 양자 물리학의 관점에서관찰자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지만 그 관찰자가 실제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라고 하는 어떤 것을 찾으려고 머리 속이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구멍으로 봐도 아무도 없습니다. 뇌 속에도 없고 대뇌피질에도 없습니다. 뇌의 피질 내부나 대뇌 변연계에도 관찰자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외부의 세계를 관찰하는 관찰자라고 하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찰자란 무엇일까요? 너무나 복잡한 양자의 혼란스럽고 신비한 세계와 그 반응들을 이해하는 그것 그것이 관찰자일까요?

 

저는 관찰자를 몸속에 있는 영(靈)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계 속의 귀신과 같다고 할 수 있죠. 껍데기를 움직이는 것은 의식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주위를 관찰하고 몸은 온갖 종류의 감각기관을 갖추고 주위의 신호들을 포착해 냅니다.

 

1993년 여름에 흔히 범죄의 도시라고 불리는 워싱턴 D.C에서 큰 실험이 있었습니다. 수백 개의 나라에서 온 자원자들이 하루 종일 명상을 일정기간 함께 하는 실험이었죠. FBI에서는 그 정도 규모의 사람들의 명상은 범죄율을 25% 정도 감소시킬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한편, 경찰관계자는 그해 겨울에 눈이 60 센티 이상 와서 범죄율이 25% 감소할 것이라고 TV에 나와서 말했죠.

 

하지만, 결국 경찰은 이 연구에 공저자가 되었죠. 왜냐하면, 실제 결과가 25% 범죄 감소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선 48개의 연구에서도 이미 예측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당연히 의문을 가집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보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하구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각 개인은 우리가 보는 현실에 영향을 미칩니다. 비록 우리가 현실도피를 하거나 현실의 희생자가 된다고 해도 말이죠. 우리 모두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모토 박사는 물의 분자구조와 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은 4대 원소 중에 수용성이 가장 뛰어나죠. 이모토 박사는 물이 비물리적인 현상에 반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실험계획을 세우고 물에 정신적인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암시야 현미경으로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후지와라 댐의 물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선승의 축복을 받은 후의 똑같은 물의 사진입니다. 그리고 다음 사진들은 이모토 박사가 글자를 출력해서 증류된 물의 병 외부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밤새 놔두었죠. 첫 번째 사진은 원래 물 그대로의 순수 증류수의 사진이고 다음 이어지는 사진들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죠.

 

"사랑의 기"란 글자를 붙인 물 이것은 "고마워"라는 글자를 붙인 물입니다. 여기 아래 보면 이 물병에 붙인 글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어를 아신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일본어로 '아리가토'라고 쓰여 있음). 이모토 박사는 생각이나 의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생각이 어떻게 분자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물의 분자구조에 한해서죠. 우리 몸의 90%가 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매혹적인 이야기죠. 놀랍지 않나요? 만일 생각이 물에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다면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정말로 생각 하나만으로도 몸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방식으로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의지를 적어내려 가다가도 지워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런 다음 다시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시간적 평균으로 보면 그 의지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결국 그 의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사실로 변해버립니다.

 

여러분이 기본적으로 물 위를 걷을 수 있는 존재로 여러분을 인정한다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이일종의 긍정적 사고라는 것을 압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멋진 개념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긍정적인 생각의 얇은 막입니다.

 

그 막은 부정적인 생각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긍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위장해 놓은 것일 뿐이죠.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것을 더 견고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현실에 갇혀버립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구체적이라면 분명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실제 현실을 바꿀 수도 없게 되죠. 하지만, 현실이 나의 가능성 즉 의식 자체의 가능성이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라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이미지를 확장할 수 있을까요? 고전적 사고관에서는 나는 어떤 것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현실에서 어떤 역할도 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나름대로 움직이는 물질적인 존재입니다. 결정적인 법칙에 의해서 말이죠. 그리고 수학은 주어진 환경에서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결정합니다.

 

경험자인 나는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수학이 어떤 것을 알려줄 수도 있고 이러한 움직임들이 취하는 여러 가능성을 알려줄 수도 있지만 내가 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경험은 알려줄 수 없습니다.

 

내가 그 경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내가 나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물리학 같은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뉴에이지류의 폭탄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양자 물리학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인생은 무엇인가? 그리고 너의 인생은 왜?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난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 도대체 사물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현실은 무엇일까?

 

놀랍지 않나요? 만일 생각이 물에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현실은 경험 속으로……. 성공적인……. 생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생각의 본질이 존재하는 걸까요? 난 그게 네가 실제라고 생각하는데 달려있는 것 같아. 세상은 현실의 시간선 위에서 우리가 선택하기 전까지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죠. 양자장의 모든 현실은 동시에 존재하는 걸까요? 중독에 대한 저의 정의는……. -멈출 수 없는 어떤 것이죠-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합니다.

 

거시적인 세계도 존재하고 세포의 세계도 존재합니다. 원자와 핵의 세계도 존재합니다. 이 세계들은 각자 모두 다른 세계입니다. 그 세계들은 나름의 언어와 수학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작은 세계가 아니라 각자가 모두 다른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들은 서로 보충해줍니다. 왜냐하면, 저는 원자이기도 하고 세포이기도 하며 눈으로 보이는 생리학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모든 것이 진실이고 단지 다른 단계의 진실일 뿐입니다. 과학과 철학에 의해 밝혀진 가장 깊은 진실은 단일성이라는 기초적인 진실이죠. 현실의 가장 깊은 소립자적 단계에서는 여러분과 저는 글자 그대로 하나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창조합니다. 가끔은 제 마음이 일어났으면 하는 모든 것들을 검토하기 때문에 제가 의도적으로 하루를 창조하는데 있어

조용히 요점에 이르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리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루를 창조할 때 아무 곳에서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저는 그런 것들 역시 나의 창조의 결과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압니다. 점점 더 그렇게 알아 갈수록 제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더 많은 신경망들이 저의 뇌에 만들어지죠.

 

그것들은 다음날에도 계속할 수 있는 힘과 자극을 줍니다. 중독을 통해서 우리는 최고의 멋진 기회를 맞이합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 3차원 세계에서 파악할 수 없는 특성의 고귀함과 날마다 그러한 특성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한 차이점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죠.

 

그래서 우리는 중독이화학적으로 황홀한 감정이며 척추의 내분부선을 통하지 않고서도 일어나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적인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단지 하나의 성적 환상으로 남자는 자극을 받습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 있는 하나의 생각이 발기로 이어지는 것이죠. 발기를 일어나게 하는 외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존재할 뿐이죠.

 

제가 어렸을 땐 신에 대한 많은 개념을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전, 제가 그때 그 개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 의식적이지 못했다는 걸이제야 실감합니다. 즉 저를 이곳에 존재하게 하고 은하와 우주를 만든 위대한 존재와 함께 한다는 개념이었죠.

 

그런 개념이 어떻게 종교로부터 나왔을까요?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수 세기 동안 내려온

종교와 다양한 철학들의 문제의 대부분은 출발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신은 우리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이며 나는 신을 숭배해야 하고 인생의 마지막에 보상을 위해 웃으며 기도하고 희망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것이 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죠. 신은 그렇게 광대한 것입니다. 조직화된 종교와 관련된 대부분이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제 생각엔 그것들이 세상과 여성들에게 많은 불행을 끼친 어떤 것이기도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도 불행을 끼친 것이기도 하죠.

 

그리고 우리는 같은 지점에서 거대한 과학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겨자씨가 신의 왕국보다 크다고 하는 예수의 말을 설명해주는 가장 근접한 과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 맞는 유일한 과학은 양자 물리학입니다. 이제 우리는 반중력장에서 중력장, 영점장에 이르는 엄청난 기술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에 대한 낡은 개념과 우스운 미신 역시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협을 받으면 이렇게 지속되어 온 형벌의 심판에 대해 똑같은 행동을 취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신이 존재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전통적인 신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신에 대한 풍자를 하면 사람들은 그를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사회질서를 전복하려는 사람으로 느낍니다. 신은 나약한 인간의 위대함보다 틀림없이 위대합니다.

 

그리고 정말 인류의 위대한 기술보다 위대합니다. 신은 우리의 가장 뛰어난 것도 넘어섭니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자연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의 위대함을 등지고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은하의 한구석에 있는 지구상의 보잘것없는 탄소 조합이 신의 전능을 배신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오만의 절정은 그들 자신의 이미지로 신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의 통제의 절정입니다. 생각을 일으킬 때의 뇌는 벼락 치는 풍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시냅시스의 틈은 번개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구와 비유할 수 있죠. 번개가 치기 전의 징조인 검은 구름이 하늘에서 끓기 시작하고 전기적인 자극들이 그 속을 통과합니다.

 

전기적 섬광의 선을 따라 바닥을 칩니다. 일관된 생각을 일으킬 때 뇌는 천둥치는 폭풍우 같습니다. 생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뇌 호르몬 속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뇌의 각 부분에서 일어나는 맹렬한 폭풍입니다. 몸속에 지도화 되어 있는 이러한 것들에 사람들은 반응해야 하고 그것들은 홀로그램 이미지이며 분노, 살인, 증오, 동정이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뇌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특정한 신경망이 반응하기 때문이죠. 이는 '뉴런'이라고 하는 미세한 신경 세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뉴런은 뻗어있는 미세한 가지를 가지고 있고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어 뉴런망을 형성합니다.

 

뉴런들이 연결되어 있는 곳은 생각이나 기억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래서 뇌는 조합된 기억의 법칙에 의해 자체의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개념과 생각, 감정들은 모두 이 뉴런망의 상호연결로 구축된 것입니다.

 

각 뉴런의 상호 간의 가능한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사랑의 개념과 감정은 이 광대한 뉴런망 안에 축적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개념을 각자 다른 개념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실망에 연결시키기도 하고 사랑을 생각할 때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슬픔, 화 심지어 분노를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노는 상처나 특정사람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이 거꾸로 사랑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외부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모델을 세웁니다. 그리고 정보를 더 많이 가질수록 점점 그 모델을 한가지나 다른 방식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외부세계에 대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리하고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들은 과거 우리의 경험과 우리가 가지고 있고 가져왔던 감정적인 반응에 의해 채색됩니다. 우리의 감정에 반응하고 통제할 때 누가 주인 자리에 있는 걸까요?

 

우리는 생리학적으로 뇌 세포가함께 반응하고 엉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반복해서 연습하면 이러한 뇌 세포는 장기적인 관계를 갖게 되고 매일 화를 내거나 좌절하는 것을 반복하거나 매일 괴로워하거나 인생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이유를 되뇐다면

여러분은 매일 신경망을 재구성하고 재통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경망은 긴 시간에 걸친 그러한 관계를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다른 신경세포들과 연합하게 되죠. 또 뇌 세포는 같이 반응하거나 얽히지 않기도 합니다. 장기적인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몸속에서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생각의 과정을 제지할 때마다 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신경세포들의 오래된 연결이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자극이나 반응, 그리고 자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제지하고 관찰할 때 즉 그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마치 자동적으로 환경에 반응하는 몸과 마음이 연결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감정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감정은 계획된 것이고 어떤 것을 오래된 기억 속으로 화학적으로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죠. 모든 감정은 입체영상으로 굳어진 화학물질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정교한 약국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뇌에는 시상하부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시상하부는 마치 작은 공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 감정에 맞는 특정 화학물질을 조립하는 장소입니다.

 

이 화학물질은 '페타이드'라고 불리죠. 그것들은 작은 아미노산의 고리입니다. 몸은 기본적으로 20여 개의 다른 아미노산을 만들 수 있는 탄소단위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몸의 구조를 형성합니다. 몸은 단백질을 생산하는 기계입니다.

 

시상하부에서는 '펩티드'라고 물리는 작은 단백질 고리를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감정상태에 맞는 특정 신경펩타이드와 신경호르몬으로 조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적인 상태 즉 분노에 대한 화학물질과 슬픔과 고통에 대한 화학물질 욕망에 대한 화학물질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나 뇌에서 경험을 하는 그 순간 시상하부는 즉시 펩타이드를 조합합니다. 그리고 뇌하수체를 통해 혈류 속으로 그것들을 풀어놓으면 혈류를 통해 펩타이드 조합이 흐르는 순간 몸속의 다른 중심과 기관으로 향하게 됩니다.

 

몸속의 개개의 모든 세포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에 대한 수용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포가 수천 개의 수용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외부를 향해 열려 있죠. 그리고 펩타이드가 세포에 들어오면 글자 그대로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것처럼 수용체의 표면에 앉아 그것에 붙게 되고 수용체를 움직여 대문의 벨이 울리는 것처럼 세포로 신호를 보냅니다.

 

어른이 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신호가 고장 나 감정적으로 동떨어진 곳에서 문제들을 다룹니다. 혹은 오늘 일을 어제와 똑같이 다루기도 합니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다루기도 하지만 혹은 지나치게 반응하며 다루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앞선 현실을 경험해 오면서 전체를 통합해서 다루어지는 걸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포의 외부를 따라 엄청나게 많은 수용체가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들어오는 정보들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곳이죠. 펩타이드가 들어 있는 수용체는 세포를 다양하게 변화시킵니다. 수용체는 생화학적인 사건으로 핵의 변화까지 유도하며 어떤 수용체는 세포의 핵까지도 실제 변화시킵니다.

 

모든 세포는 분명히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각 세포는 의식을 가지고 있죠. 특히 우리가 의식을 관찰자의 관점에서 규정한다면 세포의 시각이라는 것이 항상 존재합니다. 세포는 몸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죠.

 

중독에 대한 저의 정의는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멈출 수 없는 어떤 것이죠. 우리는 몸에 있는 세포들이 생화학적으로 욕망을 채우는 쪽으로 스스로를 몰고 갑니다. 화학적인 요구와 일치하는 상황을 창조해 내면서 말이죠.

 

그리고 중독은 화학적으로 찾고 있는 고지로 돌진하기 위해 항상 더 이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중독의 정의가 의미하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감정상태를 조정할 수 없다면 틀림없이 거기에 중독 되어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특정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이미 중독 되어 있는 감정 안에서 그들이 예상했던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다음 주에 성향을 바꿔서 다른 사랑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이 개인적인 요구와 정체성에 대한 예측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감정이고, 감정이 우리입니다. 감정들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화 작용이나 괄약근, 혹은 영양과 관련된 모든 세포들은 어떤 곳을 치료하거나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포들은 모두 감정의 통제를 받습니다. 제 말은 모두 활발히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감정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감정은 삶 자체입니다. 감정은 우리의 경험을 풍부하게 색칠해줍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감정에 중독 되는 것이죠.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감정들에 중독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심리학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정은 생화학적입니다. 헤로인은 감정들과 같은 수용체를 사용합니다. 쉽게 말해서 헤로인에 중독 될 수 있다는 것은 신경망의 물질이나 어떤 감정에도 중독 될 수 있다는 것이죠. 특정 감정상태를 찾기 위해 관련된 탐색명령이 계속됩니다. 제 말은 심지어 눈을 돌리는 것 조차도감정적인 면의 충족을 위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몸을 창조합니다. 모든 것은 세포단위에서 시작합니다. 세포는 단백질을 만드는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포는 뇌로부터 신호를 받습니다. 수용체는 감각에 의해 변화합니다.

 

만일 어떤 약이나 내부의 분비액이 오랜 기간에 강렬하게 자극받아 나오게 되면 말 그대로 줄어들거나 둔감해지거나 통제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비슷한 양의 화학물질이나 체액이작은 규모의 반응을 유도해내게 됩니다. 세포를 매일 일정하게 반복해서 동일한 태도나 화학물질로 충격을 주게 되면 분열하는 세포들과 더 젊은 세포들은 이러한 감정에 맞는 신경물질을 더 만들어 내게 되고 비타민이나 미네랄, 그리고 분비액의 교환을 위한 수용체는 줄어들게 됩니다.

 

심지어는 독성이 있는 물질까지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모든 노화는 단백질의 부적당한 생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나이가 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피부가 탄력을 잃고 그 탄력은 단백질입니다. 효소의 문제는 어떨까요? 소화력이 떨어집니다. 활액낭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부서지기 쉽고 뻣뻣해집니다. 뼈도 역시 약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노화는 단백질이 부적당하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먹는 음식물이 중요 한가입니다. 좋은 영양공급을 한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20년 동안 자기학대로 세포가 그 영양분을 흡수하거나 받아들일 수용체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영양분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험이 향하는 긴 항로에서 이제 진로를 수정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진로수정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주는 우리의 모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큽니다. 우주는 우리의 생각보다 항상 더 큽니다.

 

놀랍지 않나요? 만일 생각이 물에 이런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어느 누구도 당신의 아름다운 본성과 내면에서 외부로 향하는 충만한 지혜에 대해서는 다 알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중독 되는 것일까요?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꿈을 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여러분에게 더 나은 꿈을 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나쁘다고 생각할까요? 저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여러분이 좋다고 생각할까요? 저는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신의학에서는 사람들의 편에서 사람들의 자유를 충분히 이야기 해주지 않습니다. 제 말은 우리가 두려하는 문제들의 많은 부분들이 정신의학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쾌한 선택들만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선택들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멸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육체적인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뇌 안에 우리의 개성과 사람들, 장소들, 시간들, 사건들과 관련 있는 곳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뇌 안에 개성과 관련된 조직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루하거나 영적으로 감흥이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을 가슴 뛰게 하는 지식이나 정보를 얻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미디어나 텔레비전, 그리고 그들이 되고 싶어 하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육체적인 외모나 아름다움, 용기라는 말에 최면이 걸려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환상입니다. 결국, 그런 것들에 굴복해서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그들의 영혼이나 욕망이 표면으로 결코 떠오르지 못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되고 그러한 질문이 표면 위로 나타나게 되면 더 나은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질문들을 하게 되고 신경망의 도약을 위한 개념들과의 교류의 날갯짓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들의 세상과 삶을 지배해오던 오래된 개념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뇌'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뇌의 신경망을 재구성하는 영역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개념과 재접속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행위들은 내면에서 밖으로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내가 마음을 바꾸면 나의 선택들도 바뀔까요? 내가 선택을 바꾸면 나의 삶이 바뀔까요? 왜 나는 바뀌지 않는 걸까요? 내가 집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집착하는 사람이나 장소, 사물, 시간 또는 사건들은 내가 그것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기서부터 인간의 삶이란 것이 펼쳐지는 것이죠. 은하계에서 종교에 젖어들어 종교의 엄청난 지배 아래 있는 행성이 어디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던가, 다르게 행동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들은 정말로 어설픈 설명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따라야할 지도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과는 비참합니다. 왜냐하면, 선이나 악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을 너무나 도피상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죄를 지었다거나 방탕하다거나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이곳에서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당신의 표현과 이해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성장시키는 경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이러한 행동을 하고 저러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당신을 심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선고하는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입니다. 동시에 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부분들과 함께하는 어떤 것의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초월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장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신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에 대한 경험을 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 매우 실재적인 무엇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신을 어떻게 규정하거나인간이나 사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에게 신을 설명하라고 하는 것은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물을 설명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은 모든 것들에 함께하는 어떤 정신입니다. 여러분은 신의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정을 걸어가야 하지만 언젠가는 여러분이 집착하는 것들만큼 이러한 추상적 것들을 사랑해야만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위대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의식적으로 나의 운명을 계획한다면 그리고 정신적인 관점에서 의식적으로 나의 현실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성찰한다면 결국, 그러한 현실이 나의 삶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하루를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도 나는 나의 하루를 창조하고 있고 근본적인 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찰자가 항상 모든 행동을 바라보고스스로에게 그러한 정신적인 방향이 존재한다면 내가 창조하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신호를 보여 줄 것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이 전개되고 또 그러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게 될 것입니다.

 

뇌는 무한히 많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는 얼마나 위대한 존재이고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것들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과 배우고 실제로 변화시키고 적용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나아질 수 있고 서로에게 실제 도움이 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존재의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거나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하거나 사람들과 사물들의 관계를 더 깊게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뇌 안에 영적인 부분을 찾는 것은 우리 모두가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체화하고그것에 완전히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을 완전히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자기라고 동일 시 했던 모습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한 스스로를 벗어나고 시간을 벗어나는 그 순간이 진실로 실재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결심을 하고 어떤 것을 하고자 할 때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양자 물리학이며 분명한 현실이고 진실 된 관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식은 주위의 사람들과 물질적인 특성들, 그리고 미래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창조하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창조가 이어지고 이러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그 존재가 되어서 여러분을 바라본 적이 있나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잠시 모든 일을 멈추고 완전한 관찰자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본 적이 있나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더 큽니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나는 주위 환경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주 자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나는 미래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있음으로 존재하고 나와 주위는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의 일부이고 나는 그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의 상호연결을 이해하고우리가 우주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단계에서우리의 신성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목적은 그러한 자유의지의 선물을 펼쳐내고 실질적인 창조자가 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과 생각들을 우주에 스며들게 하고 그러한 삶을 이루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나를 인정하고 우리가 그러한 선택권을 가진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의 존재를 인정할 때 관점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때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은 '자유'라고 하는 만질 수 없는 현상을 인간의 본질 속으로 엮어냅니다. 양자 물리학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가능성에 관한 물리학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을 함으로써 실질적인 경험이 일어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만족할만한 단 하나의 정답은 의식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착을 떠나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지식이 현실로 나타나고 우리의 몸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마음의 변화와 홀로그램으로 그리고 우리의 흐트러진 꿈들을 넘어 전혀 다른 생각들로 그 현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바타의 단계를 넘어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아왔던 예수와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신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곳엔 판단도, 증오도, 시험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비활성 물질을 움직이게 하고 혼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만질 수 없는 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형태를 갖추면 우리는 그것을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과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삶의 어떤 시점에서 무엇인가가 변화했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만일 변화했다면 비로소 우리의 존재의 이유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죠. 겉만 보고 받아들이지 말고 그게 사실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이성적인 통찰을 해보세요. ^^

 

이어서 출연한 과학자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집니다. ^^

과학자들이 왜 이렇게 이상한 얘기만 할까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봐도 좀 이상하게 들리니까 그 질문은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과학을 충분히 오랫동안 깊고 진지하게 공부하고 나서도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2편 자막

 

뉴스릴 필름이 알려드리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분쟁은 끝난 것일까요?

정신계와 과학계가 다시 결합하려고 하는 걸까요?

교회와 연구소가 의견일치를 본 걸까요?

길고 긴 혼돈의 시대를 지나 신에 대한 탐구와 우주에 대한 지식이 손을 잡고 나란히 걷게 되었습니다.

 

고대 수메르(유프라테스강 어귀의 옛지명) 시대에는 별을 관장하는 신(神)과 작물을 관장하는 신, 물을 관장하는 신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신전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지식분야를 조사하는 율법학자였고 기술자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궁금해 했고 원자이론과 천체운동 그리고 인간윤리에 관한 이론들을 발전시켰습니다. 중세 유럽에는 교회는 국왕을 옹립하고 땅을 소유하며 진리를 전파하는 절대 권력의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모든 진리를 알고 있다고 정해버린 것입니다. 교리가 곧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발전을 계속했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교리에 도전장을 던지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 부르노, 갈릴레이는 모두 교회의 압력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비극은 더 이상 과학을 억압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죠. 교회와 과학은 신을 알려고 하는 노력과 신을 알려고 하는 노력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원주의를 고안해내었고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영역을 다루고 과학은 보이는 영역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유물론이 탄생합니다. 어려운 휴전상태였지만 과학자들은 교회의 구속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환상이고 속임수이며 우리는 예측 가능한 물질우주에서 엄격하고 변하지 않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 완벽한 기계라는 논리를 내세우게 됩니다.

 

교회는 영혼이 없는 과학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라고 밀쳐 내었습니다. 다윈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조주는 무의미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우주 안에서 오직 더 나은 종으로 진화하기 위해 DNA를 전달하며 무작위로 변종한다는 것이었죠.

 

한편 과학과 종교는 모두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만일 모든 것이 기계론적인 것이거나 혹은 신이 위대한 창조주라고 하더라도 우리 인류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과학은 생명력 없는 우주를 더욱 깊게 파고들어 우연히 신비의 영역을 만나 그 비밀을 풀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의 작은 모퉁이에서 과학자들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에너지와 믿지 못할 정도의 신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신비는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물질우주는 본질적으로 물질적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비물질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단지 개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계의 이단아들은 종교지도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과학과 정신의 만남을 추진하는 많은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기계적인 관점의 문이 열렸다면 21세기는 교회와 연구소사이의 단단한 벽이 허물어지는 시대가 될까요?

 

이상으로 뉴스릴 리포터였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신비의 문 속으로 깊이 그리고 더 멀리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의 본질에 대해 더 멀리 또 깊이 알고자 하는 것을 뜻합니다. 앨리스는 토끼 굴로 들어가 매드 해터를 만납니다. (엘리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뜻함)

 

해터는 제정신이 아니었죠- 그 굴속으로 들어간 후에 그곳으로부터 다시 빠져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과학에는 두 단계가 존재합니다. 신비의 문 속으로 들어가는 무모한 부분과 또 다른 단계는 엄격하고 정밀한 과정에 대해 여러분의 그러한 생각의 무모함을 점검해보는 것입니다.

 

과학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물리학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정말 새롭고 신기한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물리학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실험을 통한 방법이 신의 계시나 명상 같은 것들이 취하는 방법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전자 실험을 하는 사람들의 실험결과에 근거해서 그들의 믿음을 바꾸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과학 사이에 혹은 과학과 종교 사이에 왜 이렇게 분명한 불화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원인이 아주 뿌리 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원인이 신념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죠. 인류의 기원을 다루는 성경의 창세기 같은 책들은 실제로 세상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학자가 창세기가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뉴스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창조의 시작에 대해 CNN뉴스 같은 생생한 이야기가 창세기에 담겨있다고 믿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650년 아일랜드의 유명한 대주교인 제임스 어셔는 성경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계산을 한 끝에 스스로 만족하려고 한일이겠지만 세상이 창조된 것은 기원전 4004년 전이라는 것을 17세기 9월 어느 날 아침 아홉 시에 애써 계산해 내기도 했죠.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까지 그렇게 설명해줄 만한 과학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합당한 단 하나의 사실은 최초의 의식이나 이상적인 가치, 선, 진리 등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선상에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모든 존재들과 크게는 우주까지 우리를 서로 연결해줄 것입니다. What the bleep do we Know? Down the Rabbit hole 과학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과학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아주 쓸쓸한 것이죠. 즉 우리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으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유전자에 의해 무작위로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또 우리는 우주의 외부에 외롭고 동떨어진 존재이며 이 외로운 우주의 동떨어진 지구에서 말하자면 외로운 실수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알려줍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관점도 형성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분리의 관점이 아주 해로운 관점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 분리의 관점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우리는 서서히 이러한 패러다임이 틀렸으며 우리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합쳐져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요소에서부터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와 그것이 나와 나의 삶에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적 환경을 필요로 합니다. 인류라는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영적인 방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온갖 실험을 하는 과학자들의 정당한 방식에 대비해서 보면 낡은 신화나 오래된 군주정치, 신과 같은 개념은 이미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라질 필요가 있고 우리에겐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비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양자물리학이든 어떤 것이든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올라서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적인 방향은 의학에서는 거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지만 음……. 의식이 실재적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각을 넘어서야 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에서, 뇌 안에서, 신경조직 관찰자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기억과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들, 그리고 어떻게 실질적인 경험이 만들어지고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종의 관찰자와 물질 간의 상호교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에 있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큰 의자나 트럭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불도저나 로켓의 이륙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물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그 사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뇌가 매초 무한한 정보를 처리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우리는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감각의 경험 속에 빠져버립니다. 현실이라는 감각 속에 빠져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소위 외부의 현실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도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걸러집니다.

 

뇌는 초당 4000억 개의 정보를 처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은 단지 2000개 정도입니다. 이 말은 현실이 우리의 뇌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눈은 어떤 면에서는 캠코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눈은 단지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정보들은 실제로 조합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과 세상의 의미에 관한 영화를 조합하려면 모든 것들을 실제로 조합하는 편집자의 책상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 갑자기 당연한 일들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보죠. 내 눈에 이상이 없다는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침대 옆에 단단하게 보이는 마룻바닥도 실제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절벽이나 비슷한 다른 것들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능성들을 다루지 못한다면 저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저는 마비되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눈이 결과적으로 언제든지 나를 속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경험이 있을 수도 있지만 비록 그러한 경험이 없더라도 눈이 우리를 결코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증명하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시각은 분명히 정확하지만 아침에 침대 밖으로 나오려는 결정을 할 때 침대 옆의 바닥을 보는 나의 시각에 맞추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다양한 가설들로 설정하게 됩니다.

 

한 가지 가정은 실제 바닥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정은 바닥이 있다는 것이 환상이며 그곳은 바닥이 아니라 절벽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침에 침대에서 나올 때도 다른 가정에 비해 하나의 가정이 맞는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현실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종종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것이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질적인 현실이 되는 것이죠. 뇌가 초당 4000억 개의 정보를 처리하고 우리가 그중에 단지 2,000개만을 인식한다면 현실은 뇌 안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뇌는 정보를 계속 받아들이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합하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습관의 틀을 벗어난 지식이나 정보를 대한다고 해도 예를 들어 양자물리학과 신경생리학의 지식을 합친다고 해도 뇌는 그 내용을 충분히 그리고 깊이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곳의 가정과 가능성 그리고 잠재성을 조사하고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에 우리의 지식을 결합시켜 그러한 절차를 계속 반복하게 되면 이때 뇌는 다른 두 개의 독립된 신경망을 통합시키게 됩니다.

 

새로운 비전을 창조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새로운 비전은 섬광처럼 빛납니다. 그리고 그 비전은 우리의 몸에 관련된 정보와 주위의 환경과 시간에 관한 정보를 약간 더 넘어서서 2000여 개의 정보 중에서 섬광처럼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어떤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한 이해라고 부르는 것이죠.

 

사람들은 제게 왜 양자물리학에서는 왜 그렇게 작은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글쎄요. 세 가지 가능한 정답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양자물리학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일을 하고 운전을 하고 그 밖의 일들을 하겠지요.

 

두 번째 관점에서 보면 양자물리학은 세상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특히 전자공학 분야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슈퍼마켓에 가면 물건을 스케닝하여 계산을 합니다. 그것은 양자물리학 덕분이죠.

 

하지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 번째입니다.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논제이지만 왜 철학자들이 세상에 대한 가정을 해체하는데 그렇게 열정적일까요? 저는 양자물리학을 연구하고 그것을 고전물리학과 비교하면서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양자물리학과 고전물리학은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과 우리의 본질을 이해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방식입니다. 고전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기계입니다. 그리고 기계는 의식적인 경험의 여지가 없죠. 기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고 여러분이 기계를 없앨 수도 있습니다. 기계를 쓰레기장에 버리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죠.

 

만일 세상이 정말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양자물리학입니다. 세상은 태엽시계 같은 것이 아니며 훨씬 더 유기적이라는 것이죠.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어떤 형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인 것입니다. 이런 유기적인 환경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고전적인 방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나 자신뿐 아니라 세상에게도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도덕과 윤리가 관련되어있는 기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이것이 세계관을 바꾸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핵심입니다.

 

우선 아원자 세계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 후 그 아원자 세계가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아원자 세계에 대해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것은 작은 실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정신 나간 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란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조그만 실험으로 극히 짧은 시간에 제한된 공간에서 큰 에너지를 발견해내려고 하죠. 아원자의 영역에서는 그건 정말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리고 아원자물리학은 그 영역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해 내려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양자물리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과학을 필요로 합니다. 양자물리학은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관적인 가설들을 필요로 합니다. 도대체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생각, 감정, 직관들이 관련되리라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개념적인 관점에서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이론을 이야기하고 또 한편으로는 실질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이전에 보았던 어떤 이론보다 합당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이론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일종의 긴장된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양자물리학의 토대를 조사하면서부터는 양자물리학을 정보의 기준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양자물리학이 한편으로는 모순 되고 혼란스러우며 개념적으로도 당황스러운 이론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던져버리거나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펼쳐진 물리학 시스템의 성질을 예측하는데 양자물리학은 검증된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매우 신기합니다. 우주는 두 가지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세상 즉, 공간과 시간의 세계에서는 수백 년 전에 세워진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물질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법칙은 당구공이나 대포알 중력 등과는 매우 잘 맞아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작은 단위로 내려가게 되면 예를 들어 원자의 단위로 내려가게 되면 또 다른 법칙이 지배합니다.

 

그것들이 양자의 법칙. 양자이론, 양자물리학이죠. 그 단계에서 입자는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고 "중첩" 시공간을 넘어 파동처럼 보이기도 하고 엄청난 거리로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파동작용에 지배를 받는 통일장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양자세계와 전통적인 세계 사이의 경계선과 출발점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파동의 기능이 가끔 붕괴됩니다. 왜냐하면, 양자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중첩되어 존재하고 여러 곳에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전적인 세계에서 이러한 다수의 가능성들이 특정적이고 제한적인 선택에 의해 붕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하나의 특정위치를 갖게 되는 것이죠. 양자물리학은 실재로는 정보의 흐름과 잠재적인 전자들의 흐름이고 가능성과 정보가 펼쳐짐과 응축입니다.

 

"잠재적"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전자의 세계가 아니라 잠재적인 전자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실제로 파동은 무엇인가요?"라고 묻겠지요. 파동의 장은 무엇일까요? 바다일까요? 아니오, 우주적인 바다입니다 순수한 잠재성의 바다입니다. 추상적이고 잠재적인 존재의 바다죠

 

우리는 그것을 "통일장" 혹은 "초끈장"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성하고 있고 모든 사물의 연계성은 현실이라는 바탕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의 발견자 중 하나인 쉬레딩거는 이러한 연결의 개념인 얽힘이 단지 양자물리학의 특성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양자물리학에서도 아주 이상한 특성이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이나 경험에는 맞지 않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세상이 물질, 덩어리, 원자 등으로 만들어졌다고 배웠습니다. 원자는 다시 분자로 만들어져 있고 모든 것은 분자로 되어있죠. 하지만 실제 원자의 대부분은 비어있습니다. 에를 들어 이 농구공이 원자핵이라면 수소원자를 예로 들면 수소원자의 전자는 이 원자핵 주위의 외부궤도를 도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거리는 대략 원자핵에서 약 32km 정도를 떨어져서 돌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이는 비어있습니다.

 

사실 우주의 대부분은 비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 비어 있는 공간의 단위로 내려가게 되면 결국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곳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이런 우주의 미세한 기초단계에 정보와 패턴이 존재합니다.

 

이곳을 '프랭크스케일'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우주의 바탕이죠. 그러한 단계에서는 빅뱅 이후의 모든 정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주의 대부분은 물질이 존재하더라도 대부분 비어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대부분 진공이 비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의 일관된 이론에서 보면 진공 속에는 10의 94승과 맞먹는 양의 에너지가 존재하며 E=Mc^2 이론으로 보면 그 에너지의 양은 엄청난 것입니다. 실제로는 얼마나 되는 걸까요?

 

실제로 우주가 평평하다고 가정한다면 많은 천문학적인 정보로 볼 때 실제 우주가 평평한 것들이 비워져 있다고 보지만 그렇게 가정했을 때 크기가 10의 -23승 큐빅 센티미터 속에 있는 수소원자 속에 있는 진공의 에너지는 만일 그 진공 속의 잠재적인 에너지를 끄집어낸다면 그 에너지의 양은 우주의 모든 별들과 행성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수조 배가 됩니다. 정말 엄청난 것이죠.

 

만일 의식을 통해 그 소량의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면 빅뱅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NASA(미 항공우주국)와 영국우주국에서는 이 믿을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에너지의 바다로 접근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접근한다면 다른 은하까지도 여행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빈 공간에 믿을 수 없는 에너지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이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심지어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개념은 바로 이 숨겨진 존재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만지거나 보이지도 않지만 이 존재로부터 모든 것들이 솟아올라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실재의 영역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이 물리적 실재를 이해하려 하고 물질이 실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생명의 근본이 되는 핵심단위를 찾으려고 더 빈틈없이 들어가면 갈수록 삶과 우주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립니다.

 

그리고 점점 더 추상적인 것과 마주치게 되고 순수하게 추상적인 영역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추상적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통일장'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그것이 순수하고 추상적인 잠재성입니다. 순수하게 추상적인 존재. 순수하고 추상적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동의 파도 속에서 솟아올라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과 입자와 사람들을 창조해냅니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더 이상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나 개념, 정보들입니다. 그리고 말했듯이 닿지도 않는답니다.

 

또 신기한 것은 물질은 서로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공을 튀기면 공의 원자와 땅바닥의 원자는 실제로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닿은 게 없는 거죠.

 

물리학에서 알게 모르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시간을 절대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암시 같은 것이죠.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우주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아닙니다.

 

신이 "1초, 1초, 1초……." 라고 말하지도 않고 "1미터, 1미터, 1미터……." 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중력의 장에 있고 여러분의 머리는 실제로 다리보다 아주 미세하지만 더 빨리 움직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서 사물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간의 방향이 시작되는 것이죠.

 

하지만 양자와 미세한 세계에서는 열역학 제2법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사물이 시간을 거슬러 갈 수도 있고 시간이 없는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의 기본적인 방정식은 역시간(逆時間) 대칭의 특징이 있습니다.

 

역시간 대칭이 의미하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이고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즉, 이 법칙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에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과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커피에 우유를 섞었듯이 커피에서 우유가 나올 수도 있고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 더 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죠.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과거를 바꾸기 위해 할 수도 있는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 모든 것에도 똑같은 식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하는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과거에도 똑같이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세상을 정신적으로 경험하는 방식과 심한 대립을 일으키고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틀린 것이 되어버립니다.

 

양자물리학이 오랜 시간 동안 탐구해온 사실에도 불구하고 가장 납득이 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는 미래가 현재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개념입니다. 우리는 과거가 현재의 원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공을 쥐고 있다가 그것을 놓으면 떨어지는 것이죠. 원인이 있고 땅에 떨어지면 결과가 됩니다.

 

하지만 땅이 제가 공을 놓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시간에 따라 흘러간다는 것은 단지 의식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양자이론에 따르면 여러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뇌 안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투영하는 의식과 관련하여 뇌 안에서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신경학자인 밴 리빗이란 사람이 아주 중요한 실험을 했습니다. 리벳이 한 실험은 뇌에 이상이 있는 신경외적인 환자의 뇌를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의식이 있을 때 뇌를 노출시켜 두개골과 머리부분을 국소마취 하고 뇌로 접근했습니다. 환자들은 깨어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 있었죠.

 

예를 들어서 리빗이 한 실험은 손가락 끝을 자극한 후 그 손가락과 관련이 있는 반대편에 있는 감각지각 신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전기적으로 그것은 기록되었고 환자에게 손가락에 언제 자극을 느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또 반대로 뇌의 특정 감각신경을 자극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손가락에 자극을 주면 일정시간 안에 대뇌피질로 그 자극이 전달되어 아주 짧은 시간 뒤에 환자가 그것을 느낀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리고 뇌를 바로 자극하면 환자가 즉시 그 자극을 느낀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손가락을 자극했을 때 환자는 그 자극을 즉시 느꼈고 뇌를 직접 자극하자 시간의 지연이 있었습니다.

 

리빗은 모든 자료를 정리하고 이 실험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결국 리빗은 뇌가 시간에 거슬러 올라가면서 정보를 투영시킨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뇌의 감각피질에 이르는 데는 미세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뇌는 시간을 거슬러 그것을 투영시킵니다.

 

그래서 자극이 일어났을 때 의식적인 지각을 통해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손을 움직이거나 어떤 말을 하는 순간에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의식적으로 지각하기 전에도 뇌의 어떤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는 실험결과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한 뒤 내가 그 행동을 하기로 결심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 행동을 한 뒤가 되어 버리죠.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것이 실제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이 우리를 속이고 있답니다. 그럼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궁금해지겠지요.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현실은 단지 정보의 흐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매 순간 끝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죠. 양자물리학의 불가사의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더블 슬릿 실험입니다. 이 실험을 이해하려면, 우선 물질의 작은 소립자 혹은 구(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만일 구슬 같은 작은 물체를 무작위로 화면으로 쏜다면 그 구슬들이 틈을 통과하여 벽에 맞아 만드는 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슬릿을 하나 더 더해보죠. 그러면 그 옆에 같은 모양의 막대무늬를 볼 수 있겠죠

 

자 그럼 파동을 살펴봅시다. 파동은 슬릿을 통과한 후 방사상으로 퍼져 나가서 벽을 가장 세게 도달하는 것은 슬릿을 직접 통과한 선이 되겠지요. 화면에 있는 선의 밝기는 그 강도를 나타냅니다. 여기까지는 구슬로 실험했을 때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슬릿을 하나 더 더하면 다른 일이 일어나지요. 만일 하나의 파동의 꼭대기가 또 다른 파동의 바닥과 만나면 파동들은 서로 상쇄됩니다. 그래서 벽에는 간섭무늬가 생기게 되죠. 파동의 꼭대기가 만나는 곳이 가장 강도가 센 곳- 가장 밝은 선을 띱니다.

 

상쇄된 곳은 아무런 무늬도 생기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물질을 두 개의 슬릿을 향해 던지면 이런 무늬 즉, 맞은 부분의 띠가 생기고 파동을 통과시키면 많은 띠를 가진 간섭무늬가 생깁니다.

 

지금까지는 좋습니다. 양자의 세계로 가볼까요? 전자는 아주 아주 작은 물질입니다. 마치 작은 구슬 같은 것이죠. 하나의 슬릿으로 전자들을 발사시키면 우리가 구슬로 했던 실험과 같이 하나의 띠가 생깁니다. 만일 이 작은 조각들을 두 개의 슬릿을 향해 쏜다면 구슬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띠가 생기겠죠?

 

뭐라고요? 간섭무늬가 생겼습니다. 물질의 작은 단위인 전자를 통과시켰는데 작은 구슬에 의해 생긴 무늬가 아니라 파동과 같은 무늬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 작은 물질의 조각이 파동과 같이 간섭무늬를 만들어 낸 것일까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영리합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작은 입자들이 서로 간섭하여 그러한 무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한번에 하나씩 전자를 쏘기로 합니다. 서로 간섭할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죠.

 

하지만 한 시간 후에 똑같은 간섭무늬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작은 전자가 입자의 형태로 떠난 뒤 파동으로 전위되어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한 후 스스로 간섭을 일으킨 후 입자처럼 벽에 부딪힌 것이죠.

 

하지만 수학적으로 그것은 더욱 이상합니다. 입자는 동시에 두 슬릿을 통과하기도 하고 어느 것도 통과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 둘 중 하나만 통과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하나만 통과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가능성이 입자가 여러 곳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결과에 완전히 당황해서 입자가 실제 어떤 슬릿을 통과하는지를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슬릿에 관측 장치를 놓고 입자가 통과하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하지만 양자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롭습니다. 관찰할 때 전자는 입자와 같이 움직였습니다. 여러 개의 간섭무늬가 아니라 두 개의 띠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느 쪽을 통과하는지 알기 위한 바로 그 관측, 관찰 장치가 두 개의 입자가 아닌 하나의 입자를 통과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전자가 스스로 관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려고 결정한 것이죠.

 

물리학자들은 여기서 전에는 없었던 양자의 신비로운 세계로 한 발 더 들어가게 됩니다. 물질은 무엇이고 입자와 파동은 무엇일까? 파동은 무엇이 움직이는 것일까? 이러한 것들과 관찰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관찰자가 단지 관찰함으로써 파동의 기능이 붕괴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관찰자입니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일어나는 일들과 스스로를 너무 동일시시켜서 관찰자의 측면을 잊어버린 곤 합니다. 이것이 물질주의자들이 길을 잃고 관찰자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되죠. 물리학적 자료를 통해 우리는 물질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우리가 '외부'라고 부르는 것들을 단순화시켜놓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원자와 아원자의 입자 혹은 어떤 형태의 원자와 아원자의 물질도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고 조사하기로 한 순간 외부에서 우리가 관찰한 특징이 변해버립니다. 관찰자란 무엇일까요? 너무나 복잡한 양자의 혼란스럽고 신비한 세계와 그 반응들을 이해하는 그것 그것이 관찰자일까요?

 

양자의 영역에 이르러 그것을 층층이 밝혀낸 과학자들의 관찰이 없이는 양자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모든 것들이 관찰자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결론적으로 그 영역에 맞아 떨어진다고 해도 모든 것이 관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영역을 또 다른 각도에서 수학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자물리학의 영역에서 우리 스스로를 세상의 관찰자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물리학 체계의 또 다른 부분의 관찰자로서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관찰자 역할을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양자물리학에서 전통적으로 공식화된 단 하나의 방법은 관찰자를 우리가 이야기하는 체계의 외부에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온갖 종류의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지죠.

 

"그 책은 양자물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써 놓은 책이야"

"그리고 난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있고"

"하지만 그 문장의 두 번째 부분은 분석하려고 하지 마"

"왜냐하면 양자물리학에 적용시키면 그것은 분해 돼 버릴지도 모르니까"

이것이 물리학체계의 발전에 두 가지 독립된 법칙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는 그것을 관찰하지 않을 때 적용되는 것이고 하나는 관찰할 때 적용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것을 수학기호화하거나 수학공식으로 만드는 방법은 없습니다. 의식적인 관찰자가 정답을 끄집어내는 바로 그 행위를 보고 "관측기구로, 그것을 기록했다"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고 테이프에 기록되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것은 방정식의 한 부분을 빠뜨려버린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테이프를 보아야 하지만 그 사람이 그 테이프를 보기 전까지는 거기에는 아무것도 기록된 것이 없는 것이죠. 관찰하지 않을 때는 가능성의 파동으로 존재하고 관찰하게 되면 경험의 입자로 변해버립니다.

 

우리가 단단한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입자는 실재로는 소위 "중첩"되어 존재합니다. 가능한 위치의 파동으로 퍼져있는 것이죠. 모든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사하는 순간 가능한 위치에서 하나의 위치로 고정됩니다.

 

운동의 방정식이 예측하는 범위에서 파동의 기능, 즉 농구공의 초입자성이 농구장 위에 균일하게 퍼져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만 여전히 그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양자물리학의 법칙에 따르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위치에 있게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농구공의 위치를 물어 볼 때도 그렇게 되어버리죠. 즉, 양자물리학에서는 초입자성으로 농구장의 퍼져 있는 농구공의 위치를 묻는 것은 5라는 숫자의 결혼상태를 물어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러분이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5라는 숫자가 결혼했는지 총각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런 질문이 처음부터 부적당한 것입니다. 숫자 5가 결혼상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어 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셈이죠.

 

이와 비슷하게 농구장 위에 파동이 균일하게 퍼져있는 농구공도 분명히 물어볼 수 있는 위치가 없는 것입니다. 쉬레딩거의 방정식이 특정 환경에서 그 위치를 예측하고 실험실에서 그런 환경을 재구성한다고 해도 농구공은 그런 상태로 가야만 하지만 결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위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측정의 문제에서 어려운 문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 위치에 대해서도 분별 있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우리는 농구공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고 또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보게 됩니다.

 

농구공을 과학적 허구의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특정위치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농구공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실제 어떻다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특정 위치에서 항상 그것을 본다는 사실이 전자의 운동방정식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거기서 측정의 문제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관찰할 때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웅은 세상이 우리가 선택할 때까지는 가능한 조각들로 존재한다는 중첩을 알고 있어요.

 

영웅은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다든지 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들이죠. 그리고 하나를 선택해 다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기도 하죠. 여러분의 마음이 무의식 속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창조해냅니다. 가능성들이 중첩되어 여러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것이죠.

 

이 말은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그것들을 자각할 수도 있지만 잠시 후엔 하나하나가 서로 무너져 내리는 다양한 가능성이 서로 중첩되어 존재합니다. 미래의 계획을 세우거나 생각에 앞서 생각을 향하는 것…….

 

하지만, 이 이상하고도 불가사의한 양자의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은 동조(비국소성)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현상 즉 시간의 개념을 깨뜨리고 공간에 대한 개념 역시도 무너져 버립니다. 두 개의 사물 즉, 같이 만들어진 두 개의 전자는 서로 동조합니다. 하나를 우주 밖으로 보내보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에 자극을 주면 다른 하나는 즉시 반응합니다.

 

즉시 그래서 정보가 무한한 속도로 전달되거나 아니면 실제로 그것들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서로 동조하는 것입니다. 빅뱅의 순간 이후부터 모든 것들은 서로 동조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여전히 접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공간이라는 것은 단지 물질이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구성개념입니다. 우리가 아직 신비의 문 속으로 충분히 멀리 들어오지 않은 걸까요? 미국에는 수많은 연구소가 있습니다.

 

그냥 눈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 사물들도 두 개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 사물을 사진으로 찍어 과학자들에게 보여주더라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여기 색깔이 멋있네. 여기도 있고 저기도 두 가지 무늬가 있군. 그게 뭐 대수야? 중첩은 미리 검출해내는 것입니다. 사진에서 제가 말하는 것은 나중에 발견되는 것입니다.

 

보통의 환경에서 독립된 사물이 일단 탐지되면 하나의 장소에만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물질이 두 개의 장소가 아니라 실제로는 3000개 이상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가 존재합니다. 우선 이 물질들은 보스-아인쉬타인 응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물질들은 하나의 파동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입자라는 뜻이죠. 그것이 하나의 파동의 작용이라 하더라도 그 파동은 다양한 위치를 보입니다. 여러분은 구멍 속에서 두 개의 사물이 보인다고 하지만 그것은 두 개의 사물이 아닙니다. 하나의 입자입니다. 하나의 입자가 두 장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루기 힘든 부분이 그것이 여전히 하나의 파동이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3000개의 동떨어진 파동작용이 아니라 하나의 파동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입자입니다.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이 말을 거짓말이라고 한다거나 과학자들이 헷갈려한다는 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너무 신비로워서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입자가 3000개의 독립된 장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중에 하나의 무게를 재면 무게는 1/3000이 되는 것인가요? 글쎄요. 그중 하나만 뽑아서 무게를 잴 수 없습니다. - 왜 그렇죠? 그것은 하나의 입자이기 때문이죠. 그것은 음…….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입자입니다. 하지만, 그 입자는 각각 독립된 장소에 존재합니다. 그중에 하나의 크기도 잴 수 없나요? - 없습니다. 그 입자는 나눌 수 없습니다.

 

이 점이 여러분이 다루기 힘든 개념적인 부분이죠. 3000개의 분리되어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비록 그렇게 보여도 그렇다는 것이죠? - 맞습니다. 사실 실제로는 3000개까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단순하게 둘, 혹은 서너 개의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 등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공간에 떠있는 작은 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의 각기 다른 부분입니다. 그것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네 개나 여섯 개의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파동이 움직임이고, 하나의 사물입니다.

 

정말 골 때리지 않나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잠깐만요……. 그게 아니라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또 저기도 있는데요." "그러니까 분명히 하나, 둘, 세 개입니다." 라고 하겠지만 여러분은 다른 것들로부터 하나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떼어 놓으려고 하면 모든 것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 스타트랙 같은 영화를 보면 "Beam me up, Scotty." (공간이동을 할 때 쓰는 말) 그런 종류의 말이 나오지만 그게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여기서 하나의 물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설프게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어떤 일 때문에 화를 내고 점심을 먹고 마치 겉으로는 놀라운 어떤 일도 없는 듯이 집에 가고 또 삶을 영위합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지만 그렇게 사는 바로 우리의 눈앞에 놀라운 마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개의 블랙박스를 준비합니다. 내부는 다이오드나 발진기 EPROM 저항기나 용량기 같은 아주 간단한 전기회로가 있죠.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나의 박스를 알루미늄 호일로 싸서 전기가 흐르는 패러데이 상자 안에 넣어둡니다. 다른 하나는 충분히 검증되고 내면을 스스로 충분히 다루는 4명의 명상가에 둘러싸인 책상 위에 놓아둡니다.

 

명상가들이 깊은 명상상태에 들어가 주위 환경을 정결하게 합니다. 기본적으로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절차와 명상가들의 의도에 의해 그 장소를 성소(聖所)로 만드는 것이죠. 그중 한 명이 이 장치에 대해 특정한 의도를 이야기합니다.

 

그 의도라는 것은 특정 목표의 실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정제수의 ph농도를 높이거나 낮추는 것이죠. 이러한 장치를 이용해서 많은 실험을 했는데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명상은 네 명의 명상가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약 15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각 명상가들은 추가적으로 장치에 그들의 의도를 심었습니다. 이 장치 중 하나를 알루미늄 호일에 싸서 가벼운 포장을 한 다음 택배포장을 하여 2000마일이 떨어진 미네소타의 실험실로 보냈습니다.

 

그 장치는 그곳에 도착한 후 전자장치가 된 패러데이 상자에 넣어졌습니다. 다음날 같은 조건에서 실험을 계속하였습니다. 실험은 기본적으로 계속되었고 장치 중 하나를 꺼내 15 센티에서 30 센티 간격을 두고 실험장치 옆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일정기간 그것을 켜놓았습니다. 우리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또 다른 요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치 즉 의도가 심어진 전자장치로 불리는 것들은 계속 사용을 하게 되면 공간을 일정기간 평형상태로 조정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장치가 작동을 해서 일반 PH수치보다 더 높이 올라가거나 그러한 의도가 심어진 곳은 PH수치가 떨어졌습니다. 일정수치의 PH수치를 넘어서면 여러분은 사망하게 됩니다. 이 말은 이러한 실험이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REG 즉, 무작위 추출기계는 전기적으로 동전을 던집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발생시켜 나온 숫자를 계속 기록하는 것입니다. 수백 번 혹은 1960년대부터 40년 이상 계속된 기계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작동되어 무작위로 나온 정보를 만들어낼 뿐이죠.

 

동전 던지기처럼 0과 1만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버튼을 누르게 한다고 하면 그 기계는 200비트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리고 0보다 1이 더 나오도록 이야기를 하고 글자 그대로 온몸을 써서 수백 번의 실험을 계속하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죠.

 

'그 사람이 0이 나오는 것보다 1을 더 나오게 한 게 과연 영향력이 있을까?'라고 말이죠. 전체적인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영향을 미칩니다. 어쨌든 그런 의도는 무작위 추출 기계의 실험결과와 연관이 있습니다.

 

1이 더 많이 나오도록 바라면 기계는 1이 더 많이 나옵니다. 양자물리학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부분에도 완전히 임의적이고 무작위의 과정에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O.J 심슨의 재판이 계속되고 있을 때 TV에서는 관련된 법정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TV를 시청했습니다. 그 드라마의 영향력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라딘박사는 동시에 많은 의도가 있으리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그 드라마를 분석하는 다수의 심리학자들을 고용해서 무작위 추출기계의 반응을 동시에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라딘박사는 법정에서 의도들이 강해질 때마다 그 무작위 추출기계가 무작위성에서 아주 많이 벗어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 사람들이 스스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우리 각 개인 모두가 우리가 보는 현실에 영향을 미칩니다.

 

설사 그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희생자가 되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죠.

 

이모토 박사는 물의 분자구조와 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은 4대 원소 중에 수용성이 가장 뛰어나죠. 이모토 박사는 물이 비물리적인 현상에 반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실험계획을 세우고 물에 정신적인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암시야 현미경으로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하나의 샘플에 각각 5cc의 물을 떨어뜨려 각각 50개의 샘플접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50개의 접시를 영하 25도에서 세 시간에 걸쳐 냉동시킨 후 꺼내어 영하 5도의 냉장고에 넣고 카메라 장치가 되어 있는 현미경으로 사진을 찍어 50개의 개별적인 사진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정보도 없는 사진이었죠. 그리고 정보를 제공한 후 위와 같은 절차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정보제공 전의 사진과 나중의 사진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느낌이나 물에 대한 감사함을 물에 투영하자 물은 아주 아름다운 결정을 만들어냈습니다. 종종 저는 물이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사진은 후지와라 댐의 물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선승의 축복을 받은 후의 똑같은 물의 사진입니다. 그리고 다음 사진들은 이모토 박사가 글자를 출력해서 증류된 물의 병 외부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밤새 놔두었죠.

 

첫 번째 사진은 원래 물 그대로의 순수 증류수의 사진이고 다음 이어지는 사진들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죠. "사랑의 기"란 글자를 붙인 물, 이것은 "고마워"라는 글자를 붙인 물입니다. 여기 아래 보면 이 물병에 붙인 글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어를 아신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일본어로 '아리가토'라고 써있음)

 

이모토 박사는 생각이나 의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생각이 어떻게 분자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물의 분자구조에 한해서죠. 우리 몸의 90%가 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매혹적인 이야기죠.

 

놀랍지 않나요? 만일 생각이 물에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다면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무작위 추출 기계실험에서 가장 흥미로운 실험 중 하나는 그 결과가 시간을 초월해서도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프린스톤대학의 연구원들과 몇몇 다른 연구원들이 이미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의 화면대신에 기계화된 상황 즉, 오디오 테이프를 준비했습니다. 그 테이프들은 왼쪽과 오른쪽이 무작위로 기록되는 기계였죠. 아무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그 무작위로 테이프에 녹음을 시켰습니다. 이미 기록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것을 금고에 보관한 뒤 또 다른 기록된 테이프를 건네주면서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즉, 이 테이프를 집에 가지고 가서 들어보되 왼쪽의 소리가 오른쪽의 소리보다 더 많이 들리도록 실험자들이 그 테이프에 의도를 전달하라는 것이었죠. 실험자들은 지시대로 했고 그 테이프는 다시 회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금고 속의 보관한 테이프역시도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 개 모두가 오른쪽보다 왼쪽의 소리가 더 많아진 것이었죠.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실험참가자가 실제 테이프를 듣는 순간 그 테이프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생각이나 주의력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미 결과가 만들어진 순간까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방식으로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가 주위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떤 것이든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 이유는 제 삶을 예로 들어보자면 삶 속에서 기쁨이나 행복 성취감이 부족한 이유는 정확히 이러한 것들에 대한 나의 초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희생자라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내가 희생자라고 여기고 있는지를 말이죠. 그리고 계속해서 불행과 사고들과 비극과 마주친다면 아마도 그것은 나의 정신이 기본적으로 인생이 그렇다고 받아들이는데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집중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일반사람들은 그들의 주의력을 분당 6초에서 10초까지 잃습니다. 원하는 것에 집중을 하고 싶다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고대 신비주의의 가르침에서 사람들에게 불꽃에, 실제로는 성냥불에 집중하는 법을 가르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걸 통해서 여러분의 주의력이 아주 명확한 방향으로 일어나게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결국 에너지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우주가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마음도 역시 피상적인 것에서부터 심원한 것까지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일반적인 생각의 단계인 피상적인 곳에서 사용한다면 그 힘은 아주 제한될 것입니다.

 

손을 이용하지 않고는 테이블 위의 먼지 하나도 옮기지 못하겠죠. 의식이 약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의식은 우주까지도 창조해냅니다. 우리가 손길 하나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손에서 빵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궁금해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항상 왜 그렇게 할 수 없을까를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그 정답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결코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그 정답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를 규정하는 습관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의 감정적이고 습관적인 필요를 넘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결코 충분히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생각이 물에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다면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생각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를 생각……. 생각의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이것은 내가 꾸는 꿈입니다. 마치 꿈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여러분 앞으로 다가와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처럼 당신이 꿈꾸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꿈의 단계로 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뒤로도 앞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 시간을 거슬러 간 것이죠. - 시간의 앞으로 가면……. -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 정보는……. - 역시간 대칭……. -물론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서도 시간을 앞질러서도 갈 수 있습니다.

 

양자장에서는 모든 현실이 우연히 존재하는 것일까요? - 경험의 실제 결과는……. - 글자 그대로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거시적인 세계도 존재하고 세포의 세계도 존재합니다. 원자와 핵의 세계도 존재합니다.

 

이 세계들은 각자 모두 다른 세계입니다. 그 세계들은 나름의 언어와 수학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작은 세계가 아니라 각자가 모두 다른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들은 서로 보충해줍니다 왜냐하면, 저는 원자이기도 하고 세포이기도 하며 눈으로 보이는 생리학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모든 것이 진실이고 단지 다른 단계의 진실일 뿐입니다. 과학과 철학에 의해 밝혀진 가장 깊은 진실은……. 단일성이라는 기초적인 진실입니다. 현실의 가장 깊은 소립자적 단계에서는 여러분과 저는 글자 그대로 하나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리학자들은 여기에 "동조"라는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아인쉬타인은 양자물리학이 옳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여기에는 멀리서라도 보이지 않는 힘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인쉬타인이 의미한 것은 일상적인 감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공간 속에서 두 개의 장소처럼 보인다는 것이고 그 둘은 갈라져서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분명하게 볼 수 없는 어떤 깊은 단계에서는 공간 속의 두 개의 장소는 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은 함께 위치하고 존재하는 것이죠. 우리가 상식이라는 것이 글자 그대로 감각을 통해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는 것이라면 그리고 세상이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영혼이나 신비에 관한 경험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상하게 느껴지는 영혼이나 신비경험에 관한 모든 관점은 여러분의 머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시간이나 공간의 어딘가에 있는 일들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이 던져주는 관점은 이러한 신기한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대를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양자물리학은 나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그것이 어떤 신호나 힘 혹은 다른 것이든 다소 신비한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관점으로 이르게 합니다.

 

여러분의 머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또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제가 멀리 떨어진 사람과 텔레파시를 통해 느낀다면 그것은 제가 뛰어나가 그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어떤 깊은 차원에서 보면 저의 뇌와 그 사람의 뇌가 함께 같은 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할 때 우리는 항상 동조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아주 충격적인 것이죠. 제가 여러분과 동조하게 되면 제가 글자 그대로 여러분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원거리 투시 실험도 가능합니다.

 

여기서도 그런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후레쉬 불빛을 보고 뇌의 잠재적인 부분은 그 불빛의 특징을 포착합니다. "환기능력" (evoke potential)이라고 하죠. 그 신호는 뇌와 연결된 EEG 장치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불빛 없이 앉아 있고 여러분들을 볼 수 없다 해도 뇌의 잠재적인 부분은 여러분과 함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의지에 의해서 저는 여러분의 경험과 직접적으로 의사소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지가 제게 동시에 비슷한 뇌의 잠재성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실험은 멕시코 대학의 Jacobo Grinberg가 처음으로 했고 지금은 런던의 Peter Fenwick에 의해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에 일어나는 일들은 시작점이 되어야 합니다. 위대한 생각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창조합니다. 가끔은 제 마음이 일어났으면 하는 모든 것들을 검토하기 때문에 제가 의도적으로 하루를 창조하는데 있어 조용히 요점에 이르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리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루를 창조할 때 아무 곳에서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저는 그런 것들 역시 나의 창조의 결과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압니다. 점점 더 그렇게 알아갈수록 제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더 많은 신경망들이 저의 뇌에 만들어지죠.

 

이런 훈련은 다음날에도 계속할 수 있는 힘과 자극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관찰자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모두 각자의 현실의 관찰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개별적인 의식들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해냅니다.

 

물리학자 아들인 에반은 현실이 부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어떤 현실을 점유하고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현실을 점유한다면 예를 들어, 오늘 오후에 열리는 슈퍼볼 게임에서 이클스 팀이 점유한 현실과 페이트리어팀이 점유한 현실은 서로 다른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들 중 하나가 실제 현실이 되겠지요. 그래서 부가적이고 간섭적인 패턴이 존재합니다. 양자물리학을 계속 연구하고 우리의 의견이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단순한 사실도 이해하게 됩니다.

 

단순하게 놓고 본다면 사람들이 관찰의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 힘을 쏟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의 관찰에 대응하는 아원자 세계를 보죠. 하지만, 보통사람은 분당 6초에서 10초마다 집중하는 시간을 놓칩니다. 그래서 집중하는 시간의 여지가 그다지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중심과 집중조차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반응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어설픈 관찰자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관찰의 기술을 아직 마스터하지 못했는지도 모르죠. 관찰은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외부의 세계에 너무 빠져 있어서 외부세계의 반응이나 자극에 너무 빠져 있어서 뇌가 창조의 영역이 아니라 반응의 영역에만 움직이는지도 모르죠. 우리에게 알맞은 지식과 이해가 주어진다면 그리고 알맞은 훈련이 주어진다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신호들을 돌아보기 시작할 것이고 조용히 앉아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그러한 노력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원사가 씨앗을 돌보듯 매일 그것을 유지한다면 그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차원의 실험실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집단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고 그 실험실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며 그 상상한 것을 창조해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배울 것입니다 이 말은 의식적으로 충분히 집중하는 여러분의 의지가 이러한 것들이 물질화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의식은 무엇일까요? 의식이라는 것은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의식은 무엇일까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의식을 설명하려고 해왔고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발견해내고 인간인 우리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왜 우리가 의식을 가지는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의식을 정의하는 간단한 방법은 의식이 알아채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죠. 특히 자신을 알아채는 것을 뜻합니다.

 

최소한 우리는 인간으로써 자기 인식을 하고 있고 거울을 보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술에 매여 있는 광신종교보다 의식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다루는데 있어 과학이 의식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양자물리학 뿐 아니라 물리학의 방정식에서는 의식이 제외됩니다. 간단한 이유 때문이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간편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데는 아주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의식은 조밀한 물질의 세계에 들어온 정신의 부산물입니다. "우리가 과연 신을 알고 있는가?" 이 질문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길고 긴 성장의 여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신을 흰 수염을 하고 인간을 위에서 바라보는 위대한 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지구의 삶이 일정기간 신에 의해 주어진 일종의 시험장소라고 생각하고 신이 위에서 무릎 위에 조그만 컴퓨터를 놓고 신의 뜻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신을 모독하는지 기록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이 믿는 형태의 신을 모독할 수 있을까요? 또 어떻게 그것이 신에게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어떻게 신이 그 모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영원한 벌을 내릴 수 있을까요?

 

이런 개념들은 이상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사람들은 많은 두려움과 한계와 불안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이러한 불안 위에서 필사적으로 믿든 그렇지 않든 종교가 효과적으로 퍼지는 이유가 됩니다.

 

사람들은 끝없는 형벌이라는 대단한 문장에 쉽게 위협을 느끼고 기꺼이 그 말에 빠져버립니다. 십계명 속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어떤 마음이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돌보는데 너무나도 바쁜 나머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꿈은 꾸어보지도 못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근본적인 음모일 수도 있겠지요. 비록 어떤 사람이 종교의 예복을 오래전에 던져버렸다고 해도 여전히 종교적인 틀 안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움직이는 모든 개념은 종교에 의해 형성된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 시스템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전에는 발전된 관점조차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조직화된 종교들의 문제들 중 하나는 개신교만이 좋다거나 혹은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만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고 하는 분리의 감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양자물리학에서 이해하는 우리의 이해는 완전한 하나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의식상태에서 우리의 영성(靈性)을 끌어내야 합니다. 왜 나는 항상 분리를 느낀다고 묻는다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영혼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을 이야기할 때는 항상 구름 속에 흰 수염을 하고 판단하고 지켜보고 벌주고 보상하거나 명령하는 나이든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단 그 궤도에 올라서게 되면 여러분은 영적인 진화나 개발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길을 가게 됩니다.

 

성장을 원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 그들을 보살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을 위해 예수님께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나의 믿음을 예수님께 맡기기만 하면 죄로부터 나를 구해주고 나를 보살피고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 점심을 먹을 수도 없고 나를 대신해서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나를 구원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신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구원을 받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종교에 집착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실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위대함을 깎아내리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울타리를 열고 신을 영원하고 절대적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법칙은 시리우스나 장미우주 혹은 R우주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법칙입니다. 허블망원경이 마침내 우리의 가슴과 마음에 무한한 아름다움을 가진 은하를 발견해내었습니다.

 

2-2편 시작

 

더 위대한 마음을 만나고 더 작은 마음의 세계를 만나는 것은 짜릿한 경험입니다. 그 마음의 끝은 어디일까요? 끝은 없습니다.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임을 회피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종교와 같은 생각의 틀 속에 갇혀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 안에 갇혀 그 불안정한 생각의 위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고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종교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가 화려하게 꾸며놓은 우리 자신의 불안을 탓하고 그러한 수많은 생각의 틀은 인류역사를 통해 잘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 틀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것을 자극하게 됩니다.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점점 더 동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새로운 꿈은 마치 우리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천둥처럼 그 전기신호는 신경망의 하늘에서 존재의 땅으로 자극을 주고 몸속에 감정의 폭포를 만들어냅니다.

 

거기에 따라 우리의 몸은 감정적으로 그 경험들을 의욕적으로 정복하고 성취하려는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두려워하는 존재를 꿈을 꾼 후에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처럼 두려움 없는 존재로 만들거나 변화시켜주게 하는 홀로그램이나 이러한 화학물질이 없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성취나 즐거움은 없을 것입니다.

 

전두엽은 인간의 뇌에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전두엽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신경계의 활동을 통해 그리고 전두엽이 이행하는 일반적이거나 복잡하지 않고 분명하고 특별한 방법을 통해 우리는 자유의지의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과학의 이론을 위배하지도 않습니다. 또 그것은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주관적인 느낌과도 어느 정도까지는 일치합니다. 인간이 다른 종과 구분되는 것은 뇌에서 차지하는 전두엽의 비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뇌에서 전두엽의 역할은 굳은 의지를 가능케 하고 의사결정과 행동을 통제하며 영감을 주게 하는 것입니다. 전두엽은 우리가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결정이나 선택을 할 때도 전두엽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선택이나 결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뇌는 '뉴런'이라고 하는 미세한 신경 세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뉴런은 뻗어있는 미세한 가지를 가지고 있고,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어 뉴런 망을 형성합니다. 뉴런들이 연결되어 있는 곳은 생각이나 기억으로 구체화 됩니다. 그래서 뇌는 조합된 기억의 법칙에 의해 자체의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개념과 생각, 감정들은 모두 이 뉴런망의 상호연결로 구축된 것입니다. 각 뉴런의 상호 간의 가능한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사랑의 개념과 감정은 이 광대한 뉴런망 안에 축적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개념을 사람마다 다른 개념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실망에 연결시키기도 하고 사랑을 생각할 때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슬픔, 화 심지어 분노를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노는 상처나 특정사람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이 거꾸로 사랑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관찰되는 모든 것들은 양자의 치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양자의 치수가 기억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항상 기억의 거울에 반영을 통해 어떤 것을 인식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존재하는 '나'를 인지하게 하는 것은 기억의 거울에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뇌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 뇌가 기억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특정한 신경망이 반응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생리학적으로 뇌세포가 함께 반응하고 엉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반복해서 연습하면 이러한 뇌세포는 장기적인 관계를 갖게 되고 매일 화를 내거나 좌절하는 것을 반복하거나 매일 괴로워하거나 인생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이유를 되뇐다면 여러분은 매일 신경망을 재구성하고 재통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경망은 긴 시간에 걸친 그러한 관계를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다른 신경세포들과 연합하게 되죠. 또 뇌세포는 같이 반응하거나 더 이상 얽히지 않기도 합니다. 장기적인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몸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생각의 과정을 제지할 때마다 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신경세포들의 오래된 연결이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정신적인 연습을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우리의 기술은 두뇌의 어떤 회로를 만들어 내고 연습한 만큼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점점 더 쉬워진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내일을 미리 경험할 수도 있고 이러한 연습을 확신과 좋은 느낌을 가지고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종교교리에도 생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없지만 또 여러분의 기도와 의도가 신에 의해 응답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종교교리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양자물리학과 관찰자와 관련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 현실적인 생각을 만들 수 있을 때 우리의 두뇌는 그렇게 계획되게 됩니다.

 

무한한 공간을 가지고 있는 전두엽은 우리가 생각을 놓아두고 우리에게 장기적인 시간동안 생각을 품고 있도록 해주는 제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자극의 볼륨을 낮추어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양자장으로 발걸음을 들여놓는 그 순간이 다른 어떤 것보다 생각을 더 생생하게 경험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육체적으로 화학적으로 감정적인 인간입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죠. 우리가 똑같은 감정에 접근하고 매일 똑같은 태도를 취하는 경우 그리고 삶에서 변화와 진화의 측면에서 갈 곳이 없어질 때 그것이 우리의 한계가 됩니다.

 

매일 우리가 중독되어 있는 똑같은 감정을 단지 경험하기만 하면서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실제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나는 내가 누구이며 나의 성격을 재확인하고" "나는 이것을 해야 하고 여기에 가야하고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주인은 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죠. 생각의 주인은 시간 속의 하루하루를 현실의 길과 아직 경험하지 않은 감정을 창조하는 기회로 봅니다. 그리고 그 하루는 무한한 미래를 더 풍부하게 해주는 하루가 됩니다.

 

뇌에는 시상하부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시상하부는 마치 작은 공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 감정에 맞는 특정 화학물질을 조립하는 장소입니다. 이 화학물질은 '페타이드'라고 불리죠. 그것들은 작은 아미노산의 고리입니다.

 

몸은 기본적으로 20여 개의 다른 아미노산을 만들 수 있는 탄소단위로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몸의 구조를 형성합니다. 시상하부에서는 '펩티드'라고 불리는 작은 단백질 고리를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감정 상태에 맞는 특정 신경 펩타이드와 신경호르몬으로 조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적인 상태 즉 분노에 대한 화학물질과 슬픔과 고통에 대한 화학물질 욕망에 대한 화학물질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나 뇌에서 경험을 하는 그 순간 시상하부는 즉시 펩타이드를 조합합니다.

 

그리고 뇌하수체를 통해 혈류 속으로 그것들을 풀어놓으면 혈류를 통해 펩타이드 조합이 흐르는 순간 몸속의 다른 중심과 기관으로 향하게 됩니다. 몸속의 개개의 모든 세포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에 대한 수용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포가 수천 개의 수용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외부를 향해 열려있죠 그리고 펩타이드가 세포에 들어오면 글자 그대로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것처럼 수용체의 표면에 앉아 그것에 붙게 되고 수용체를 움직여 대문의 벨이 울리는 것처럼 세포로 신호를 보냅니다.

 

어른이 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신호가 고장 나 감정적으로 동떨어진 곳에서 문제들을 다룹니다. 혹은 오늘 일을 어제와 똑같이 다루기도 합니다. 본래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오래된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순간들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죠.

 

그리고 우리의 가능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시작하게 됩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그 변화가 영원할 정도로 충분히 수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색을 더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완벽하게 객관적인 것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모든 일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앞선 우리의 경험들과 감정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는 감정적인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과 비물질적인 정신적인 존재에서 물질로 변화된 것입니다. 사실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죠.

 

이 물질이라는 의미는 분자적인 무게를 가지고 있는 실제 분자들과 배열과 구조로 이루어진 펩티드를 말합니다. 과학은 이미 시상하부가 신경펩티드를 만들어내고 이 신경펩티드는 강한 화학물질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펩티드와 세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펩티드는 수용체를 찾아내서 그 위에 결합해서 붙어버립니다. 다시 떨어졌다가 돌아오기도 하죠. 그렇게 붙어서 세포를 변화시킵니다. 펩티드가 그 안에 자리를 잡게 되면 생화학적인 결과가 일어납니다. 어떤 것들은 세포의 핵까지도 변화시키죠.

 

모든 세포는 분명히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음……. 모든 세포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특히 우리가 의식이라는 것을 관찰자의 관점이라고 규정한다면 말이죠. 세포의 관점은 항상 존재합니다. 세포는 그것을 알고 있고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지도 또 세포분열을 해야 할지 멈춰야 할지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세포는 몸속에 존재하는 가장 작은 의식의 단위입니다. 세포는 뇌 쪽으로 소리를 지르며 명령합니다. 그리고 뇌에게 느낌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뇌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처리하기 시작합니다. 머릿속에 목소리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울한 이유를 생각하거나 우리가 혼란스럽다거나 고통의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몸이 뇌에게 아직 화학적인 필요가 아직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뇌가 활동을 시작하고 과거의 상황과 전두엽에 번쩍이는 영상들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중독에 대한 저의 정의는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멈출 수 없는 어떤 것이죠. 우리는 몸에 있는 세포들이 생화학적으로 욕망을 채우는 쪽으로 스스로를 몰고 갑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중독의 정의가 의미하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감정 상태를 조정할 수 없다면 틀림없이 거기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감정적인 욕구와 우리의 느낌을 나눌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섹시하다거나 그 사람들이 동병상련의 고통을 받고 있다거나 혹은 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을 통제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이 잘 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실험실의 동물로 실험을 했습니다. 그 동물들은 이러한 신경물질을 생산하는 뇌의 일정부분에 전기적인 중독이 되어있었죠. 그리고 화학적으로 이러한 물질을 얻을 수 있도록 조종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훈련시켰습니다. 말 그대로 신경화학물질이 나오도록 말이죠. 그러자 배고픔이나 성욕, 갈증이나 수면욕보다 오히려 신경화학물질이 나오는 조종버튼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이 상황은 육체적으로 기진맥진 할 정도로 계속되어서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하게 되어서야 멈추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스트레스가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런 스트레스에 너무나 중독된 나머지 그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그 상황을 멈추지 못합니다.

 

그 상황이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즉 우리의 선택을 흐리게 하는 화학물질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자극과 반응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두엽의 사소한 자극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실험실의 개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이미 중독되어 있는 감정 안에서 그들이 예상했던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다음 주에 비슷한 성향의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모두 모험가입니다. 사람들은 모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만일 통찰의 순간을 경험한다면 진동을 수반하는 통찰의 순간을 경험한다면 그 통찰은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몸의 세포는 가능성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됩니다. 알려지지 않은 잠재능력들과 신비의 문 속으로 조금 더 내려가는 미래의 이야기나 기회들에 의해 더욱 활기를 띠게 됩니다.

 

딜레마나 신비주의 혹은 그러한 가능성을 경험하도록 한다면 만일 그렇게 신비의 문밖으로 다시 나오게 된다면 사람들은 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러한 정보를 이미 처리해보았고 마음속이나 뇌 속에 족적을 남기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그 사람의 인식은 결코, 전과 같을 수가 없게 되죠.

 

하루하루 중독된 똑같은 감정들을 단지 경험하기만 하면서 우리가 하루의 삶을 충분히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생각의 주인은 확실히 다른 종족입니다. 생각의 주인은 하루를 시간 속에 존재하는 기회라고 보고 새로운 현실의 길을 창조해내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감정들을 만들어내서 그 하루를 무한한 내일들로 만들어 갑니다.

 

정신과 신체의 상관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사춘기의 소년들은 아시겠지만 아랫도리의 통제를 받는 경우가 많죠. 눈은 감정의 세포들의 통제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 감정에 좌우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지를 결정하게 하는 빠른 안구운동도 중뇌에 의해 조정됩니다.

 

그곳은 중재를 담당하는 수용체나 다른 수많은 수용체를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탐색명령 역시 특정 감정 상태를 찾는 것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섹스에 중독된 사람은 어떤 걸까요? 사실 섹스는 우리에게 미래를 조사하게 하는 하나의 발명입니다. 이점을 잠시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몸을 창조합니다. 모든 것은 세포단위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면 세포에 명령을 내리는 것은 누구일까요? 그 명령은 우리가 새겨놓았던 경험과 정보들을 근거로 한 뇌 속의 신경망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움직임이 일으키는 삶 속의 문제해결을 위해 어떤 상자를 이용하는 셈이죠.

 

마음의 움직임을 바꾸려면 말 그대로 신경망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하고 혹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똑같은 태도를 경험하려 하고 똑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를 그러한 정체성이라고 강화시키고 있는 셈이죠.

 

여성수감자들이 있는 감옥에서 잠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감자들은 모두 마약중독이었죠. 그들 모두가 마약을 받아들이는 수용체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고 마약을 많이 하면 할수록 몸 내부의 엔도르핀이 만들어지는 능력이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과 그 수용체가 둔감해지며 실제로는 줄어든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실질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뇌 세포가 덜 만들어진다는 이런 새로운 정보를 통해 사람들은 중독이라는 것은 오래된 습관에 갇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개인의 정신적인 삶은 고통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고통에 의해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채색되어버릴 정도죠. 그리고 그 반응하는 모든 방식이나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고통에 관한 것이 되기도 하죠.

 

수용체는 감각에 의해 변화합니다. 만일 어떤 약이나 내부의 분비액이 오랜 기간에 강렬하게 자극받아 나오게 되면 말 그대로 줄어들거나 둔감해지거나 통제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비슷한 양의 화학물질이나 체액이 작은 규모의 반응을 유도해내게 됩니다. 세포를 매일 일정하게 반복해서 동일한 방식이나 화학물질로 충격을 주게 되면 분열하는 세포들과 더 젊은 세포들은 이러한 감정에 맞는 신경물질을 더 만들어 내게 되고 비타민이나 미네랄 그리고 분비액 교환을 위한 수용체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됩니다. 심지어는 독성이 있는 물질까지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모든 노화는 단백질의 부적당한 생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나이가 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피부가 탄력을 잃고 그 탄력은 단백질입니다. 효소의 문제는 어떨까요? 소화력이 떨어집니다. 활액낭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부서지기 쉽고 뻣뻣해집니다. 뼈도 역시 약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노화는 단백질이 부적당하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먹는 음식물이 중요한가입니다. 좋은 영양공급을 한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20년 동안 자기학대로 세포가 그 영양분을 흡수하거나 받아들일 수용체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영양분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면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중독을 통해서입니다.

 

그 사람의 몸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24시간 계속해서 일어나는 그러한 감정들을 통해서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너무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환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싫어하는 이유들이 있는 상황 속으로 환생합니다.

 

놀랍지 않나요? 만일 생각이 물에 이런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어느 누구도 당신의 아름다운 본성과 내면에서 외부로 향하는 충만한 지혜에 대해서는 다 알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중독되는 것일까요?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꿈을 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여러분에게 더 나은 꿈을 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코카인이든 헤로인이든 혹은 니코틴이든 알코올이든 그것에 중독되어 있을 때는 그 물질이 새로운 뇌 세포의 성장을 저해하는 특징을 지닌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물투여가 중단되면 뇌 세포의 성장기능은 즉시 되돌아옵니다.

 

이러한 함정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함정을 발견할 때까지 쓰레기 속을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함정이 단지 가르침을 위한 장치일 뿐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새로운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한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주는 이러한 것들을 당신의 문 앞까지 가져다 놓고 여러분은 그 안에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꺼이 그것을 곰곰이 되돌아보려고 한다면 딱딱하게 굳은 마음의 설정을 넘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할 때 제가 뜻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뇌 안에 우리의 개성과 사람들, 장소들, 시간들, 사건들과 관련 있는 곳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체성과 개성을 재확인하고 있는 뇌 안에 관련된 조직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 과학은 생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들과 그리고 생각들이 어떻게 우리의 몸을 약하게 만드는가의 문제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행동운동 요법이나 그 외 방식으로 실제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이 몸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생각은 여러분의 현실 대부분을 창조해냅니다. 생각은 여러분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만들어냅니다. 여러분이 뚱뚱하지만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멋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바비인형에서 모델까지 불가능한 이미지에 항상 스스로를 비교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가치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불가능한 평균을 향해 올라가려고 애쓰고 있는 셈이죠.

 

우리가 감정적인 중독과 관련된 것들은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뉴스와 모든 미디어들입니다. 그것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고서도 아름다운 경험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을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미디어와 텔레비전 그리고 이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가득한 환경 속에 의해 너무 매혹 당한 나머지 육체적인 외모라는 점에서 볼 때 실제로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는 사람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와 용기와 같은 정의들은 모두 환상입니다. 결국, 그런 것들에 굴복해서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그들의 영혼이나 욕망이 표면으로 결코, 떠오르지 못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되고 그러한 질문이 표면 위로 나타나게 되면 비로소 더 나은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질문들을 하게 되고 신경망의 도약을 위한 개념들과의 교류의 날갯짓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들의 세상과 삶을 지배해오던 오래된 개념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마음을 동요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여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극소수입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이러한 틀들이 부서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편안함과 그러한 혼란들 뒤에 사이에서 따라오는 존재의 주인이 되었을 때 오는 실재의 편안한 상태 사이에는 가끔 거북한 기간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혼돈 속에서 희망을 포기하고 오래되고 잘못된 방호물 뒤로 숨어버립니다. 그들이 이성적인 삶을 살고 평화 같은 것 속에서 죽었다고 해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실험 장치에서 영적으로는 전혀 진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뇌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뇌의 신경망을 재구성하는 영역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개념과 재접속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행위들은 내면에서 밖으로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내가 마음을 바꾸면 나의 선택들도 바뀔까요?

 

내가 선택을 바꾸면 나의 삶이 바뀔까요? 왜 나는 바뀌지 않는 걸까요? 내가 집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마음속으로 집착하는 것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집착하는 사람이나 장소, 사물, 시간 또는 사건들은 내가 그것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기서부터 인간의 삶이란 것이 펼쳐지는 것이죠. 삶은 우리가 항상 함께 해온 거대한 책의 한 페이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항상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야망에 찬 추구는 자기를 반성하고 증오하는 지루함으로부터 새로운 꿈을 스스로 창조해내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야망에 찬 하나님들입니다.

 

지구는 은하계에서 종교에 엄청나게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유일한 행성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사람들이 선과 악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들을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이나 이러한 부분에서 문제는 내 맘대로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문제로는 도저히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사회와 부도덕한 대결에 직면해서는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겪는 불운이며 또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수하고, 배우고, 찾으며 더 나은 꿈들을 창조하기 위해 이러한 지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록은 이곳에 존재하고 내가 그것들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기록하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보다 훨씬 힘든 일입니다. 문명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에서 완벽해져야 합니다.

 

비판이 두렵기 때문에 그래야 할까요? 아닙니다. 혹은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서 아니면 죄를 짓고도 용서를 받지 못해서일까요? 아뇨,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은 이런 모든 것들이 실제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변명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견식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작용에는 내가 다뤄야 할 반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내가 현명하다면 나중에 직면해서 해결하고 마음의 평정을 다시 잡아야 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준입니다. 모든 존재의 기초가 되고 사람들이 신학적으로 묘사하는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신이 어떻게 드러나고 세상 속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는 좀 더 복잡한 문제이지만 확실히 전통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신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외부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신으로부터 내면의 신으로의 위대한 도약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발전한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신이 내면에 존재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대부분 사람이 생각하듯 신은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내면의 신을 외계영화처럼 생각합니다. 즉 가슴을 가르면 나타나는 어떤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죠. 내면의 신은 그런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신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는 뜻이고 또, 사실 우리 자신들 역시 신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의 신과 여러분의 신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하나이기 때문이죠. 신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것은 악마의 목소리라고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면 그것이 사이비란 뜻일까요? 그것이 사이비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은 분리될 수 없는 신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두뇌가 새로운 신경망으로 구성되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존재했던 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판에 박히고 자동적인 프로그램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방식으로 일처리를 하기 때문이죠.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정보를 모아서 회로를 만들고 처음으로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는 감각을 발달시키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빠져있는 어떤 행동이나 특징적인 패턴을 바꿀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제가 말한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을 기억해내기만 해도 여러분의 몸은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기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최근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에릭 캔들 박사가 설득력 있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즉 기본적으로 기억은 암호화되어있으며 여러분의 유전적인 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신경시스템이 고정되어 있고 쉽게 변하지 못한다는 쪽의 의견이 많았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엄청난 유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신경시스템 내부에서 변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뇌 구조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뇌는 통일장을 경험하고 삶의 통일성을 경험하기 위해 아주 잘 설계되고 꾸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물질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우리가 에너지 장에 의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영점장'이라고 할 수 있는 빛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선 우리는 분리라고 하는 모든 개념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리는 지금 세계의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개념을 공명하는 우주에 적용해보고 또 인간의 경험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 역시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이 공명한다고 가정을 하면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가 궁금해질 수도 있게죠.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연구를 시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연결이 되면 그것을 텔레파시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장소의 물건과 연결이 되면 그것을 투시라고 할 수 있고 시간을 넘어 일어나는 일들과 연결이 되면 예지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의도가 세상에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 쪽으로 연결이 되면 그것을 염력이나 원격치료 같은 말로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텔레파시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알려진 것들에게는 12개 정도의 목록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영성(靈性)을 이야기하는데 왜 극도로 작은 물질인 플랑크 스케일 같은 것에 관심을 갖느냐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은 외부에 어떤 곳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대답을 하자면 플랑크 상수 역시 극히 작지만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딜 가든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입체영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 퍼져있는 프랙털처럼 다른 비율로 반복됩니다. 양자물리학은 20세기까지의 물리학이었고 과학과 영성을 연결하는 새로운 무엇이 21세기에 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외부의 모든 것들은 우리들이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모른척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완전히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점에서 보면 우리는 공동의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최선의 미래를 위해서 바른 일들을 해나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개인의 삶의 자유와 양자물리학 그리고 현실을 계속 자유롭게 해서 이르는 근본적인 현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네 물론 그 현실들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루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언제 우리가 나로부터 하나로 도약할 수 있을까요? 잠재의식에는 언제쯤 이를 수 있을까요? 언제쯤 우리가 자아를 넘어 일체에 대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까요? 우리의 본성을 깨닫기 시작하면 더 이상 질문이나 정답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단지 별안간의 앎이 존재할 뿐이죠.

 

이제 신비의 문밖으로 나와서 여러분은 환상과 경이로움과 마법의 세상에서 여러분은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이해를 가지고 살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렇게 가능한 사건들로부터 의식에 의한 선택을 통해 경험이라고 하는 실질적 사건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과학은 자유의지와 만나게 됩니다. 의식은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물질만이 수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 역시 그것들이 가능성이라는 데까지로 한정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선택하는 자는 누구인가? 모든 현실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들이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평지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 개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앞, 뒤 그리고 좌우만이 존재합니다. 여기는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여기에 사는 2차원의 존재들은 3차원 사물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이 2차원의 평지인들 에게는 6면체나 구(球), 4면체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타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죠. 2차원의 관점으로 보면 3차원에서 들어온 손가락은 다음과 같이 보입니다. 맙소사! - 땅 위에 평평한 게 뭐지? - 너도 봤어? 도망쳐~! 안녕 꼬마 원~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군요. 아니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것은 수수께끼와도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을 볼 수 있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상자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안녕 꼬마 원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누가 이야기하는 거죠? 당신은 누구세요?

 

여기가 항상 설명하기가 어려운 부분이죠. 나는 다른 차원, 다른 공간에 존재한단다. 나는 너 바로 위에 있어. 제발 제발 그 단어는 쓰지 말아주세요. -무슨 말을? - '위' 란 단어 말이에요. 위에 있다는 것? 쓰면 안 돼요. 글쎄,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니? 몰라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 단어를 사용하면 무서운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요. 당신은 유령인가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난 단지 너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란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지만 넌 그렇게 할 수 없지? 네? 어떻게요? 그래, 좋아 방에 금고가 있구나! 그리고 그 안에는 동전 12개 하고 소원목록 그리고 여권이 있군.

 

어떻게 그걸 아는 거죠? 당신은 누구세요. 하나님이세요? 너와 똑같단다. 내가 너 위에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3차원에서는 네가 있는 곳의 내부를 볼 수 있단다. 3차원이라고요? 당신은 정신 나간 유령이군요. 보세요. 2차원밖에 없다고요.

 

그럼 내가 네 배를 건드리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내 피부를 잘라내야겠지요.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만~ 그만해요. 더 알고 싶니? - 뭘 더 말이에요? - 차원 그리고 방향들 아…….아뇨.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없잖아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제가 어떻게 될까요?

 

그걸 알게 될 거야. - 좋아요. - 훌륭하구나. 전혀 몰랐어요. 우습지 않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 우리를 가장 가슴 뛰게 만든단다.

 

x스핀이 어쩌고저쩌고 그 결과……. David Albert 박사 콜롬비아 대학 교수 물리학-철학협회 회장. 됐습니다. "시간과 기회" "양자역학과 경험"의 저자 이 대목에서는 웃는 게 편하죠.

 

Joseph Dispenza 박사 Life 대학 척추학 박사 "뇌의 진화와 현실창조의 과학" 출판 예정.

 

Masaru Emoto 박사 대체의학박사, IHM협회 회장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저자 /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수천 년 전에 물을 통한 영혼의 물질화에 대해 이야기.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물을 평화롭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Amit Goswami박사 전 오리건대학 물리학 교수 Noetic Science 협회 연구원. "스스로를 인식하는 우주" "양자의 창조성" 의 저자

 

John Hagelin 박사 물리학 교수 마하리쉬 경영대학 연구원. CERN 연구원 SU5 통일장이론 발견자. 과학계가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우선 건강한 회의론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David 박사에게 감사합니다.

 

Stuart Hameroff 의학박사 마취심리학 교수 아리조나의학재단 연구원. 문제는 사람들이 의식에 대해 판에 박힌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뇌는 마음이고 또 컴퓨터 같다고 하지만 그 증거도 있다고 말하지만 아직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Miceal Ledwith 박사 전 메이누스 대학 교수 국제 신학회 회원.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이란……. 고마워요. 이게 바로 신의 간섭입니다. 하늘로부터요.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발을 가지고 있군요. ^^

 

Lynne McTaggart 저널리스트 "의사들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 "필드"의 저자.

 

Daniel Monti 의학박사 토마스 제퍼슨의대 심신상관 의학프로그램 연구원

 

Andrew Newberg 의학박사 팬실베니아 대학 영성과 신경과학협회

 

Candace pert 박사 전 뇌생리학과 신경과학재단 회장 펩티드와 면역시스템 전문가. 오우 불이 벌써 깜박거리고 있네요. 보이시죠? 제가 얘기할 땐 항상 이런 이상한 일이 생겨요. 좋아요.

 

괜찮아 이봐~ 제가 잡고 있으면 괜찮아져요. 이게 뭘 뜻하는 걸까요? 이제 됐습니다. 오우 괜찮은데 아마 하나님이 당신과 만나길 바라시나 봐요. -안녕하세요.

 

딘 라딘 박사 Noetic 재단 교수 소노마 주립대학. "의식적인 우주"의 저자 관련 200여 개의 논문 공저자. 이런 것들이 사실이라는 본능적인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80퍼센트입니다. 사람들이 생소한 것들에 회의적으로 되는 이유도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을 실험실로 가져와보면 보통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배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분명히 마음과 관련된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람타 영적 지도자, 람타스쿨 설립자 채널러.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이 위대한 생각의 주인입니다.

 

Jeffery Satinover 의학박사 하버드대학 교수 예일대학 물질연구 신학회 회원.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첫째 다중 인격 장애에 대한 것과 둘째 왜 50세에 물리학자가 되신 건가요? 아……. 네 아마도 그건 다중인격장애 아닐까요? 믿으실 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저는 네 살 때부터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William Tiller 박사 스텐포드대학 명예교수

 

Fred Alan Wolf 박사 이론물리학박사, UCLA대학. 국제강연가 의식과 물리학에 관한 다수의 책 저술 "양자도약" 저자

 

이성적인 통찰을 해보세요. ^^

감사합니다!

 

 

 

양자(quantum) 마법사들

 

당신과 우주, 내면의 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블립』(What the bleep do we know!?)은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의 성공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2004년 최초 개봉 이래 전세계 30개국에서 상영되었고, 드라마와 다큐멘타리, 에니메이션을 탁월한 영화적 기법으로 혼합하여 양자물리학과 영성, 신경생리학에 관한 놀라운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개봉하자마자 에쉬랜드 독립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DC독립영화제 심사위원상, 휴스턴 독립영화제 등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우리나라에도 크게 히트한 <시크릿>에 과학적 영감을 주었다. 이 책 <블립>은 영화제작자들과 영화에 출연했던 과학자들이 양자물리학이 발견한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가득 찬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블립>을 통해 당신과 우주, 내면의 힘의 관계에 대한 새롭고도 놀라운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가능성에 눈을 뜨라!


우리는 왜 같은 생각, 같은 현실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 반복되는 생각과 현실 속에서 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블립>은 무한한 에너지로 가득한 우주 안에서 우리가 같은 생각과 현실을 반복하는 중독 상태에 빠지는 이유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뇌의 놀라운 능력을 탐구해간다. 그리고 일상의 현실을 바꾸는 위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는 모두 현실창조의 마법사임을 알려준다. 스타워즈에서 요다가 늪에 빠진 전투기를 마음의 힘만을 이용하여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루크 스카이워커가 말한다. “믿을 수 없어요!” “바로 그것이 네가 실패하는 이유지.” 요다의 대답처럼 우리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패러다임과 생각의 패턴 속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블립>이 제시하는 위대한 질문과 과학적 영감을 통해 당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가능성에 눈을 뜨라!

더 큰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라.


당신 삶의 전체 경로는 당신의 선택들로 이루어진다. 당신의 삶은 그냥 일어나지 않으며 매일 당신의 선택, 혹은 선택하지 않는 것들에 달려 있다. 하지만 당신이 창조하는 인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숨겨진 패러다임과 믿음체계를 넘어 현실을 창조하는 ‘나’를 통찰하고 당신안의 잠재력이 실재하며 개발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당신은 벽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미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창조될 현실은 바로 당신 앞에서 가능성과 에너지들은 시간이란 풍경으로 채색된 채 꿈을 실제 경험으로 나타나게 해줄 의식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다. <블립>을 통해 이원성을 넘어선 당신 자신의 전체성과 잠재력을 깨닫고 그 안에서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라!

* 블립bleep
은 무선 등의 삐 하는 소리나 라디오, 텔레비전 등에서 방송금지용 말을 제거하는 삐 소리를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는 의미로, 우리가 아는 것은 삐 소리와 같은 극히 작은 정보 조각일 뿐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동시에 최초의 미시의 상태가 평준화되지 않고 다양한 규모로 증폭되어 개인과, 사회, 국가 및 지구 차원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양자물리학적 영감과 직관을 의미하고 있다.

<블립>책속으로


우리 사회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은 모두 질문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도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질문은 모든 인간 지식의 선구자이고 첫 번째 원인이다. 그리고 인류의 모든 지식은 질문이라는 가지로부터 뻗어 나온다.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가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을 요약하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물리학자 닐 보어 역시 “전자가 A에서 B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왜 그 중간 상태에는 머물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세계를 열어준다. 그리고 질문은 미지의 세계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p.15)

인식은 복잡하고 다면적인 과정이다. 이 과정은 감각 신경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집어 뇌로 전자기적 자극으로 보낼 때부터 시작된다.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자외선을 보지 못한다. 또 새가 감지 할 수 있는 전자기장을 감지할 수 없다. (새들은 이것을 네비게이션으로 이용한다) 하지만 오감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서 대략 1초에 약 4000억 비트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과 독립된 저 밖이라는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 (p.76)

아원자의 세계는 우리의 관찰에 반응한다. 하지만 개인은 평균적으로 약 6에서 10초 간격으로 집중력을 잃는다. 초점을 맞추고 집중할 능력이 없는 개인에게 어떻게 큰 일들이 반응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우리는 서투른 관찰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아직 관찰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관찰은 기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
우리는 매일 하루의 일정시간을 할애하여 관찰을 연습하고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그려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해내고 올바로 관찰하게 된다면 그 새로운 미래는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 (p.110)

최근 하버드 대학의 엘린 랜저와 레베카 레비는 다른 문화에 살고 있는 노년층의 기억력 감퇴를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나이가 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보통 나이가 드는 것을 자신의 능력이 약해져 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고, 또 실질적인 기억력 감퇴를 겪는다. 반면 중국의 노인들은 다르다. 중국 문화에서는 나이든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실험에서도 중국의 노인들에게는 기억력 감퇴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젊은 사람과 같은 학습능력을 보였다. 모든 문화에서 노인들의 노화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콜레스테롤이 많은 소스와 (정제당이 들어간) 파이를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년까지 건강하고 날씬하게 행복한 삶을 누린다. 이 ‘비밀’을 캐기 위해 많은 연구가 행해졌는데, 현재 이론에 따르면 이렇게 먹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아야 한다. 비밀은 바로 태도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의 음식을 사랑하고, 또 그 음식을 먹는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면 태도라고 부른다. 만일 문화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전 우주에 걸친 상황이라면 그것은 법칙이 된다
. (p.152)

비록 인정하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매일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상황에 대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처럼 통쾌한 일은 없다. 우리는 그 상황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며, 시스템을 탓하고 신을 탓하고 부모를 탓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무엇을 관찰하든 그것은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예를 들어 나의 삶 속에서 기쁨과 행복, 성취한 것이 거의 없었던 이유는 정확히 이런 것들에 대한 나의 초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p.166)

뉴런이 인간의 뇌 안에서 연결되어 만들어 낼 수 있는 숫자는 전 우주의 모든 원자들보다 많다. 이 작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새가 바람에 날리는 가지에 앉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만일 계산이 가능하다고 해도, 가장 큰 슈퍼컴퓨터의 계산으로 며칠이 걸린다. 어쩌면 이것은 컴퓨터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는 아무 문제없이, 시간을 들이지 않고 늘 쉽게 내려앉는다. 전통적인 모델에서는 뇌를 전화기 숫자판이나 슈퍼컴퓨터에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를 들으면 투박하고 기계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실제 뇌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뇌는 아주 생동적이며 창조적이며 유연한 기관이다. 또 우리의 요구에 기초하여 학습하고 이해하며 역동적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p.208) 

 

  출처: 책>블립|작성자 리셋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