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에 속할 날이 며칠 남지 않은 저도 잘 모르고 지냈던 이야기들이 있군요. 예전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책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원으로 무기징역선고를 받았다는 내용을 본 것 같은데... 언론의 세뇌에 의해 60대 이상은 반신으로 추앙되는 박정희의 이면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 박정희의 가장 큰 과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 하면 된다는 그릇된 의식을 우리 국민들에게 심어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성공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못 보신 분들 보시고 생각할 기회를 가지시라는 의미로 퍼왔습니다.
[백승종의 역설] 뻔뻔한 박정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2380.html 1948년 10월 국방부는 여수순천사건에 관련된 장교 및 사병 1천여명을 검거하였다. 조사는 3개월 이상 지속되었고, 1949년 2월8일부터 군법회의가 열렸다. 그해 2월13일까지 이어진 군사재판에서 총 73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제15연대장 최남근에게 총살형이 선고된 것을 필두로, 김학휴, 조병건, 박정희, 백명종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형이, 그밖에는 15년부터 5년까지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경향신문> 1949. 2. 17.) 그러나 중죄인 박정희는 무사하였다. 직속상관인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도영이 정일권, 백선엽 등 만주군 출신들과 작당하여 구명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역시 만주군 출신의 수사관 김창룡에게 옛 동지들, 즉 군 내부에서 암약하던 남로당원의 명부를 넘겨주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피값으로 되살아난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일으켰다(1961). 군복을 벗은 그는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1963). 경쟁자인 윤보선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희는 자신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민주공화당’의 이름으로 윤보선을 고소했다. 있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윤보선이 유포했다는 것이다.(<동아일보> 1963. 9. 26.)
박정희와 그 휘하세력인 민주공화당 의장 윤치영, 공보부 장관 임성희, 민주공화당 선전부장 서인석, 정치군인 원용덕 등은 여순사건 또는 남로당과 관련해 박정희가 형을 선고받은 적이 없었노라는 거짓말을 일삼았다. 특히 윤치영과 서인석은 박정희 찬양으로 도배된 <민주공화보>를 작성해 전국의 가가호호에 뿌렸다.
박정희 추종세력은 지금까지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다. ‘그분이 남로당의 중책을 맡았던 것처럼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당원으로서 활동은 없었다. 인간관계상 최남근 등과 친하게 지내다가 그들의 포섭공작에 휘말려 술 몇 잔 얻어먹은 것뿐이다.’ 박정희는 이 거짓말쟁이들 앞에 ‘반인반신’의 성인이 되어 황금빛 동상으로 서 있다.
[백승종의 역설] 배신자 박정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3561.html 1963년 3월 박정희 일파는 장도영 예비역 중장 등 13명에게 ‘반혁명’ 혐의를 씌워 중형에 처했다. 장도영이 누구인가. 박정희에게 그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남로당 프락치 박정희를 죽음에서 구하는 데 일조했고, 현역에 복귀시키는 데도 앞장섰던 그였다. 또한 그는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자, 이를 극구 변명해 주어 5·16쿠데타를 성사시켰다. 미국은 쿠데타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만류한 사람 역시 그였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장도영을 숙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임명하는 호들갑을 떨며 우대하였다. ‘군사혁명 선포문’조차 그의 명의를 빌렸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과 국군 내부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박정희의 기만술책이었다. 상대가 설사 자신의 은인이라 해도 박정희는 권력을 나눌 뜻이 전무했다. 그리하여 장도영에게 두 가지 죄목을 옭아맸다.
첫째, 쿠데타 전야 한강다리에 헌병 50명을 파견해 혁명군의 출동을 저지했다고 몰아붙였다. 둘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정한 최고회의 의장의 겸직 금지 조항을 반대한 것도 민족 배신 행위로 매도하였다. 결국 장도영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 면제를 받고 미국으로 떠나갔다.
박정희는 일생 동안 배신을 일삼았다. ‘천황’에게 혈서까지 쓰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던 그. 일제가 패망하자 잽싸게 광복군에 몸을 맡겼다. 곧 국군장교로 변신하더니 남로당에 가입해 국가전복을 꾀했다. 그 사실이 들통나서 위기가 닥치자 이른바 명단을 팔아먹었다. 결국은 은인까지 해치웠다.
일제와 히틀러를 모방한 군국주의자 박정희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무소불위에 가까웠던 그의 권력은 기실 계엄령의 총부리와 밀실의 고문에서 나왔다. 집권 18년 동안 목숨을 잃은 시민들도 많았다. 하건만 그의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떠벌이며 독재자를 우상화하는 작태가 여전히 되풀이된다.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시민사회의 배신자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