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일체유심님이 올려 주신 자료 중 함께 읽어 보았으면 하는 내용이 있어 옮겨 봅니다. 물론 전체가 다 주옥 같은 내용입니다. 아직 못 읽으신 분은 꼭 보세요. 저처럼 한문실력이 없는 분들을 위해 한글로 변환해서 올리고 원문은 아래에 올렸습니다. 취향대로 보십시오. ^.^
서울대학병원도 고치지 못했던 신설을 동의보감을 읽고 고친 일화입니다. 제가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계기도 비슷했습니다. 저도 물론 제 지병은 고쳤고요.^.^ 남의 질병은 그 사람의 삶을 모르기 때문에 고치기 어렵지만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알기에 치료의 원리만 알면 고치기 쉽습니다.ㅋ 회원님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의 건강은 스스로 고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신산의 포로
(서울) 한동석
이신산이란 오수유와 오미자라는 이종의 식물알맹이로 된 산약이다. 그러나 정없는 식물에 불과한 이신산은 나의 화려하던 청춘과 꿈(몽)에서 부풀어오른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말았다. 과거를 회고해 보면 당시의 나는 어쩔 수 없는 이신산의 포로였다. 그러나 나는 물론 그가 나를 사로잡으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나는 이미 사로잡혔고 또 「사의 바퀴」는 나를 휘몰면서 벌써 삼십 년 동안이나 흘러갔다.
그 때의 나도 역시 현대의 청년 모양으로 습관과 전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식인이며 문화인인 줄로만 알던 나는 한의학 따위를 멸시하고 반대했던 것은 물론······아니 반대의 최선봉에 섰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무식한 근시안적 세계관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신산이라는 무정한 식물 앞에 완전한 포로가 되었으니 말이다. 과학을 지식 아닌 지식이라고 생각했으며 과학이외에는 지식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시의 나의 신념이었고 또 청진기나 주사를 써야만 의사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문명이전에 있었던 유치한 의학의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지식이었는데 그렇던 내가 포로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의 고향은 함경도 함흥이다. 어느 날 서울에 있던 나의 동생이 귀가하였다. 물론 오랜만에 돌아온 동생인지라 나는 물론 일가가 모두 기뻐했을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온 가족들의 시선과 청각은 말없이 침통하다. 왜냐하면 한없이 반갑기만 하여야 할 동생의 육체는 피골이 상접하였고 창백한 얼굴에서는 힘없는 눈동자만이 깜박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연유를 자세히 물어본즉 약 삼 개월 전부터 우연히 설사를 만났는데 백약이 무효하다는 것이다. 물론 서울에서 유명한 병원을 드나들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귀향 전에는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난 나는 정신이 몽롱하여졌다. 당시의 시골사람들의 머리는 서울대학병원이라면 죽는 사람도 살리고 앵무새를 귀동자로 만들기도 할 수 있는 곳으로만 믿고 있던 때이다. 그런데 그 병원이 손을 들었다니 말이다.
이때의 나의 심경이 한없이 착잡해진 것은 비단 동생의 병이 위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무소불능으로만 알고 있었던 동경의 탑이 무너졌기 때문에 오는 충격이 컸던 것이다.
이제는 이 환자를 어떻게 하나 하는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양의학의 대가들이 어쩔 수 없어온즉 시골인 이 땅에서 어찌 할 수 없을 것은 불문가지다.
그렇다고 전근대적인 야만적인 수법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한의의 문을 두드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늘날의 이 사회에는 당시의 나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에 포로되어있는 사람이 한없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일변도의 교육제도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인즉 몇몇 뜻 있는 사람의 힘만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시운만을 기다리고 좌시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인즉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는 다음날 아직도 몽롱한 머리를 들고 어느 날 고서점에 들러서 동의보감 한 질을 샀다. 물론 그것에 의해서 병을 고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무엇이라고 써 있는가? 알아나 보려는 충동 때문이었다.
우선 목록에서 대편문을 찾아서 딱딱한 한문의 문의를 내려 훓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의 눈에는 「신설(일명을 신설)」이라는 조목이 걸려들었다.
왜냐하면 나의 동생의 설사는 그 특징을 말하면 종일토록 무사하다가 밤 삼사경이 되면 당설을 일이차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설」에 눈이 걸리게 된 것은 당시의 내가 신설을 알기 때문이 아니오 다만 (신설)이라는 부서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은 그 때에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집중되었다. 다음에는 곳 행동에 옮겼다. 즉 오미자 일양 오수유 이전오분을 사다가 분말을 만들어 가지고 그날 밤 삼경에 조쌀(속미)미음으로 이전중을 넘기게 하였다.
물론 나는 그날 밤 자지 않고 새웠다. 다음날 아침에는 환자에게 물어보았더니 당설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극히 적은 량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삼일야를 계속 복약시켰더니 설사가 완전히 중지되고 구미가 당기기 시작하였고, 또 그 후 삼일 복약으로 환자가 완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나의 세계관은 변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과거의 대용품이며 노화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이종의 풀열매가 현대의 첨단을 걷고 있는 과학의 대본산을 무찔러 놓았으니 말이다. 따라서 지식은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과거에도 더 큰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시작하는 동시에 나의 종래의 세계관이 얼마나 무지했으며 졸렬했던가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나는 동양철학은 물론이지만 동양을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눈을 박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독학도 했고 사사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나에게 소호의 여유도 주지 않고 흘러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았는가?
마치 소가 풀 먹듯이 그냥 넘겨버린 몇 권의 책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우)는 한가할 때에 이것을 다시 끄집어내어서 「새김질」할 줄을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가 탐독한 책자를 되씹어 소화시킬 줄을 몰라서야 될 것인가?
나는 삼십 년 전에 「이신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주인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자비한 세월은 백발의 머리털과 굵직한 주름살을 안겨 놓으면서 줄달음쳐 달아났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도망가고 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여 보면 백발이 휘날리고 주름이 물결침에 따라서 통채로 삼켜버렸던 몇 권의 서적들이 차츰 소화되어 가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나는 이신산의 포로가 된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정신과 육체를 소모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바로 적자생활의 「히로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길에서 탈출하려고 애써왔으며 또 모든 인류지도자들은 중생을 이러한 함정에서 구해 내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적자생활의 길에서 구출해 내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 길에는 사정이라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정신을 분렬시키고 혼탁하게 하는 것은 모두 이것들의 작난이다. 그렇다면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정신을 통일의 주인공에게 맡겨 버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신산의 포로가 된 것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신산의 매력으로 인하여 의문에 발을 들여놓았고 또 그 길에서 열중하는 동안에 나의 인간성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분렬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고 또 통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포로생활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아직 욕구불만이 있다. 즉 이신산보다 더 크고 위대한 자의 포로가 되지 못한 것을 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신의 통일체로서 생명구출자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다만 머리 속에 담겨있는 구름(운) 때문에 이것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끝)
二神散의 捕虜
(서울) 韓東錫
二神散이란 吳茱萸와 五味子라는 二種의 植物알맹이로 된 散藥이다. 그러나 情없는 植物에 不過한 二神散은 나의 華麗하던 靑春과 꿈(夢)에서 부풀어오른 希望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말았다. 過去를 回顧해 보면 當時의 나는 어쩔 수 없는 二神散의 捕虜였다. 그러나 나는 勿論 그가 나를 사로잡으리라고 想像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나는 이미 사로잡혔고 또 「史의 바퀴」는 나를 휘몰면서 벌써 三十 年 동안이나 흘러갔다.
그 때의 나도 亦是 現代의 靑年 모양으로 習慣과 傳統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은 勿論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知識人이며 文化人인 줄로만 알던 나는 漢醫學 따위를 蔑視하고 反對했던 것은 勿論······아니 反對의 最先鋒에 섰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無識한 近視眼的 世界觀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二神散이라는 無情한 植物 앞에 完全한 捕虜가 되었으니 말이다. 科學을 知識 아닌 知識이라고 생각했으며 科學以外에는 知識이 存在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當時의 나의 信念이었고 또 聽診器나 注射를 써야만 醫師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文明以前에 있었던 幼稚한 醫學의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知識이었는데 그렇던 내가 捕虜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의 故鄕은 咸鏡道 咸興이다. 어느 날 서울에 있던 나의 同生이 歸家하였다. 물론 오랜만에 돌아온 同生인지라 나는 勿論 一家가 모두 기뻐했을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온 家族들의 視線과 聽覺은 말없이 沈痛하다. 왜냐하면 限없이 반갑기만 하여야 할 同生의 肉體는 皮骨이 相接하였고 蒼白한 얼굴에서는 힘없는 눈瞳子만이 깜박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緣由를 仔細히 물어본즉 約 三 個月 前부터 偶然히 泄瀉를 만났는데 百藥이 無效하다는 것이다. 勿論 서울에서 有名한 病院을 드나들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歸鄕 前에는 서울大學病院에 入院하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난 나는 精神이 朦朧하여졌다. 當時의 시골사람들의 머리는 서울大學病院이라면 죽는 사람도 살리고 앵무새를 貴童子로 만들기도 할 수 있는 곳으로만 믿고 있던 때이다. 그런데 그 病院이 손을 들었다니 말이다.
이때의 나의 心境이 限없이 錯雜해진 것은 非但 同生의 病이 危重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無所不能으로만 알고 있었던 憧憬의 塔이 무너졌기 때문에 오는 衝擊이 컸던 것이다.
이제는 이 患者를 어떻게 하나 하는 問題를 곰곰히 生覺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洋醫學의 大家들이 어쩔 수 없어온즉 시골인 이 땅에서 어찌 할 수 없을 것은 不問可知다.
그렇다고 前近代的인 野蠻的인 手法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漢醫의 門을 두드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늘날의 이 社會에는 當時의 나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에 捕虜되어있는 사람이 限없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科學一邊倒의 敎育制度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인즉 몇몇 뜻 있는 사람의 힘만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時運만을 기다리고 坐視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인즉 寒心하기 짝이 없다.)
나는 다음날 아직도 朦朧한 머리를 들고 어느 날 古書店에 들러서 東醫寶鑑 한 帙을 샀다. 물론 그것에 依해서 病을 고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무엇이라고 써 있는가? 알아나 보려는 衝動 때문이었다.
于先 目錄에서 大便門을 찾아서 딱딱한 漢文의 文意를 내려 훓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의 눈에는 「腎洩(일명을 晨泄)」이라는 條目이 걸려들었다.
왜냐하면 나의 同生의 洩瀉는 그 特徵을 말하면 終日토록 無事하다가 밤 三四更이 되면 溏泄을 壹貳次式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腎洩」에 눈이 걸리게 된 것은 當時의 내가 腎洩을 알기 때문이 아니오 다만 (晨洩)이라는 副書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精神은 그 때에 自己도 모르게 거기에 集中되었다. 다음에는 곳 行動에 옮겼다. 즉 五味子 一兩 吳茱萸 二錢五分을 사다가 粉末을 만들어 가지고 그날 밤 三更에 조쌀(粟米)米飮으로 二錢重을 넘기게 하였다.
물론 나는 그날 밤 자지 않고 새웠다. 다음날 아침에는 患者에게 물어보았더니 溏泄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극히 적은 量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三日夜를 계속 服藥시켰더니 泄瀉가 完全히 中止되고 口味가 당기기 始作하였고, 또 그 後 三日 服藥으로 患者가 完快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나의 世界觀은 變質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過去의 代用品이며 老化物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二種의 풀열매가 現代의 尖端을 걷고 있는 科學의 大本山을 무찔러 놓았으니 말이다. 따라서 知識은 現代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過去에도 더 큰 知識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始作하는 同時에 나의 從來의 世界觀이 얼마나 無知했으며 拙劣했던가 하는 것을 徹底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 後부터 나는 東洋哲學은 勿論이지만 東洋을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눈을 박기 始作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獨學도 했고 師事도 했다. 그러나 歲月은 나에게 少毫의 餘裕도 주지 않고 흘러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에게는 果然 무엇이 남았는가?
마치 소가 풀 먹듯이 그냥 넘겨버린 몇 卷의 冊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牛)는 한가할 때에 이것을 다시 끄집어내어서 「새김질」할 줄을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가 耽讀한 冊子를 되씹어 消化시킬 줄을 몰라서야 될 것인가?
나는 三十 年 前에 「二神散」의 捕虜가 되었다. 그러나 主人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無慈悲한 歲月은 白髮의 머리털과 굵직한 주름살을 안겨 놓으면서 줄달음쳐 달아났다. 아니 只今도 그렇게 도망가고 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여 보면 白髮이 휘날리고 주름이 물결침에 따라서 통채로 삼켜버렸던 몇 卷의 書籍들이 차츰 消化되어 가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나는 二神散의 捕虜가 된 것을 怨望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世上에 태어날 때부터 精神과 肉體를 消耗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人間이란 바로 赤字生活의 「히로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人間은 이 길에서 脫出하려고 애써왔으며 또 모든 人類指導者들은 衆生을 이러한 함정에서 救해 내려고 努力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人間을 赤字生活의 길에서 救出해 내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 길에는 私情이라는 魔鬼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人間精神을 分裂시키고 混濁하게 하는 것은 모두 이것들의 作亂이다. 그렇다면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方法은 人間精神을 統一의 主人公에게 맡겨 버리는 것 以外에는 다른 方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二神散의 捕虜가 된 것을 怨望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二神散의 魅力으로 因하여 醫門에 발을 들여놓았고 또 그 길에서 熱中하는 동안에 나의 人間性에서 일어나는 精神의 分裂을 어느 程度 防止할 수 있었고 또 統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捕虜生活에 대해 오히려 感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아직 欲求不滿이 있다. 즉 二神散보다 더 크고 偉大한 者의 捕虜가 되지 못한 것을 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精神의 統一體로서 生命救出者로서 儼然히 存在하고 있다는 것을 確信하고 있다. 다만 머리 속에 담겨있는 구름(雲) 때문에 이것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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