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관련

주역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별꽃바람 2009. 2. 9. 20:07

아래 내용은 한동석님의 우주변화의 원리 중의 일부입니다. 주역에 정통하다면 얼굴이나 신체에 나타나는 징후만 보아도 어디가 실하고, 허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공부가 된다면 거의 도인의 수준이겠지만 참고 삼아 올려 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개의 물상(物像)을 관찰함으로써 그 수상(數象)까지 파악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物의 운동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한번 추려보면 인간이 유쾌할 때에 나타나는 象을 관찰하면 우선 무엇때문에 얼굴에 그런 상이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을 괘상에 비쳐 보아야 할 것이며 괘상에서 그것을 찾게 되면 따라서 그 원리에 의하여 유쾌한 물상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즉 그 다음에는 그 '兌' 象이 연유한 바의 數象을 찾아야 한다. 이와 같은 순서에 의하여 수상까지 찾아 내게 되면 인간이 유괘할 때에는 왜 그런 象이 나타나는가 하는 이론적 근거를 일일이 찾아 낼 수가 있게 된다.


 위에서는 인체에서 일어나는 象의 한 예를 들었거니와 우리가 만일 인체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관찰한다면 七情六欲 때문에 변화하는 象은 물론 형체구조에서 나타나는 모든 象까지도 일일이 찾아냄으로써 그 상이 지난 바의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만일 어떤 사람이 손톱(瓜甲)이 연령에 비해서 너무 두껍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비폐지기(脾肺之氣)가 너무 왕성하여 金克木과 土侮木을 하고 있다는 것이 象으로 나타난 것이요, 반대로 너무 엷다고[박(薄)] 한다면 그것은 肝(木)氣가 너무 강하여 木克土, 木侮金을 하고 있다는 것을 象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인체전부를 망라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만물은 數의 象으로써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象 없는 形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말없는 형체와 능히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한 두 개만 더 들면 눈[眼]이 철출(凸出)하고 겸하여 큰 사람은 단정하지 못하고 눈이 크더라도 푹 박힌 사람은 행동의 폭이 넓고 결심도 비교적 강하다. 이와 같은 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잘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왜 그러한가 하는 것은 알기 어렵다. 그런즉 단순히 이러한 현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경험적 소산일 뿐이며 그 경험적 인식의 근본 바탕을 알아내는 것이 철학과 이성의 임무인 것이다.


 즉, 눈이 크다는 것은 木火(肝心)之氣가 너무 과항(過亢)하기 때문에 눈이 장부지정(臟腑之精)을 잘 포장하고 있지 못하는 象이다. 게다가 눈이 철출(철(凸出)하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木火의 過亢이 눈의 부위까지 움직여 놓았다는 象이 된다. 그런즉 이러한 사람은 눈이 규괘(睽卦)의 象을 나타내는 것이다. (규괘(睽卦)는 화택규(火澤睽 : )를 말함) 그러므로 이러한 象을 소유하게 되면 그 성품이나 행동은 자연히 부동(浮動)하게 됨으로써 단정(端正)을 기하기 어렵고 또한 수명(壽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결과적으로 火侮水로(처음에는 木克土 ․ 火克金하던 것이) 변하여서 신명(神明)의 본원(本源)까지 흔들어 놓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눈이 적당히 들어가게 되면 이것은 가인괘(家人卦 : 巽離家人 )의 象으로 변함으로써 차츰 正中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눈이 적고 푹 박혀 있다고 하면 전자와는 바로 반대가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런 사람은 폐신(肺腎 : 金水)之氣가 과도하기 때문에 대단하고 단정하기는 하지만 반면으로 융통성이 적다. 그러므로 이것은 항상 水克火나 金克木의 제압을 받게 되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수산건(水山蹇 : )의 象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象이라고 할지라도 눈이 적당히 누출하기만 했다면 그 성품도 비교적 너그러울 것이고 따라서 목화지기(木火之氣 : 心肝)도 적당하게 발휘될 것이므로 의학 소위 기하함(氣下陷)하는 병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건(蹇)의 象은 곧 뇌수해(雷水解 : )의 象으로 변하게 됨으로써 알맞게 조절되어지는 것이다.


註 : 필자가 미안을 느끼는 것은 인체에서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지 못하고 한 둘을 열거함에 그친다는 점이다. 그러나 본고는 원리에 불과하므로 모든 것을 열거할 수는 없다. 또 한가지 미안한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의 괘상(卦象)을 일일이 해설하여야 이해에 도움을 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치는 것은 미안하나 다만 독자제현(讀者諸賢)은 這間의 사정을 양해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상에서는 인체에서 한 둘의 예를 들었지만 기타의 동식물에 있어서도 반드시 形이 있는 곳에는 象이 있고 象이 있으면 數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연구에 있어서 ‘物, 象, 數’와 ‘數, 象, 物’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방법은 연역적 방법이냐 혹은 귀납적 방법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아니며, 또는 경험적 방법이냐 관념적 방법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오직 정당한 방법은 물, 상, 수의 관찰에 정통할 수 있는 방법만이 참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