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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

별꽃바람 2017. 10. 11. 14:38

해탈이란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자아탐구와 명상의 차이점

자아탐구는 마음을 진아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명상은 자기 자신이 브라흐만Brahman, 즉 실재-의식-지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욕無慾과 지혜의 관계

무욕이 지혜다. 둘은 다르지 않다.

무욕이란 마음이 어떠한 대상으로도 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지혜란 마음속에 아무런 대상도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진아가 아닌 것을 구하지 않음이 무욕이고, 진아를 벗어나지 않음이 지혜다.

 

행복은 진아의 본질

행복은 바로 진아의 본질이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다. 현상계의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우리는 무지無知로 인하여 어떤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이 밖으로 향할 때, 그것이 경험하는 것은 불행뿐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달성 되면, 그 마음은 제자리로 돌아와 행복을 즐기지만, 그것 역시 진아의 행복이다. , 깊은 잠을 잘 때, 삼매에 들었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면서 순수한 진아의 행복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경험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있다가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그늘 아래에서 안주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아를 떠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현상계를 헤매며 불행을 느끼고, 어쩌다가 한 번씩 진아로 돌아와서 행복을 경험한다. 사실 현상계란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현상계가 사라질 때, 즉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며 현상계가 나타날 때 불행을 경험 한다.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하나?

모든 경전에서는 해탈을 얻으려면 마음을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진아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책을 통해서 가능하겠는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지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진아를 알아야 한다. 진아는 다섯 가지 감각의 내부에 있으며, 책은 그들의 밖에 있다. 따라서 책 안에서 진아를 찾아봐야 소용이 없다. 자신이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 사이의 차이점

깨어있는 상태는 길고 꿈꾸는 상태는 짧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 상태에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꿈꾸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다.

꿈꾸는 상태에서 마음은 다른 체(Body)를 가진다. 또 어느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마음은 의식의 차원이 변화함에 따라 각 의식의 차원에 맞는 체를 갖게 된다. 깨어있을 때 가지고 있는 것이 육체physicail Body이고 꿈속에서는 에테릭Etheric, 에스트랄Astral 체를 갖거나 간혹 멘탈mental 체를 갖기도 한다.


어느 때에 진아眞我(진정한 나)를 깨달을 수 있는가?

현상계現象界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객관 세계, 대상 세계, 주관과 분리된 객관으로서 인식되는 세계, 여기에서는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 이 물질 세계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의식 차원에서 객관화되어 나타나는 모든 현상 세계를 통틀어서 의미 한다.

예컨데 불교식으로 설명한다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를 통틀어서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때로는 좁은 의미로, 물질세계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현상계가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한은 진아를 깨달을 수 없다.

 

현상계가 실재 한다는 인식과 진아에 대한 깨달음과의 관계는 뱀과 밧줄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길을 가던 사람이 떨어진 밧줄을 뱀이라고 잘못 오인하는 경우).그 뱀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밧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진아를 깨달을 수 없다.


신 또는 스승이 구속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가?

신과 스승은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지 벗어난 상태를 주지는 않는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일단 호랑이의 입 속으로 들어 온 먹이는 다시 빠져나갈 수 없듯이, 일단 스승의 자애로운 은총 속으로 들어온 제자는 스승에 의해 구원 받게 되어 있다.

물론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 자신의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무집착無執着이란

생각이 일어날 때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그 생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무집착이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진주를 캐오듯이 우리는 무집착을 달고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진아라는 진주를 캐내야 한다.


가장 훌륭한 수행자

자기 자신을 진아, 즉 신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자기 자신을 신에게 던진다는 말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진아 안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모든 것은 신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 지고한 신의 힘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 왜 우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는가?

기차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다 운반해 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왜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진아의 본질

오직 진아 만이 실재實在하며 현상계, 개아個我, 신 등은 진아 안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진아는 <>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곳이며 <침묵>이라고도 한다. 진아가 곧 현상계이고 진아가 곧 개아이며 진아가 곧 신이다. 진아는 모든 것이다.


자아탐구는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나?

마음속에 대상이 남아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가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이 탐구를 통하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진아를 깨달을 때까지 완전히 진아에 몰입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요새 안에 적이 남아있는 한 그들은 언제고 다시 공격해 오겠지만, 나타나는 족족 없애버리면 요새는 결국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순수한 진아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진아에 대한 명상이 깊어짐에 따라 그 생각들은 사라져 간다. 가능 하냐 가능하지 않느냐를 따지지 말고 진아에 대한 명상을 계속 해 나가야 한다. 설사 큰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여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우선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모든 힘을 기울여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선한 마음이 따로 있고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세속적인 대상이나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에 쏠리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에게 나쁘게 대해도,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욕망과 증오는 둘 다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실은 모두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남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자신의 자아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자아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자신을 낮출수록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또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어디에서든 살 수 있게 된다.


호흡을 통한 마음조절

마음을 조절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호흡조절을 통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흡이 조절 되는 동안 만이며 호흡이 흐트러지면 마음이 다시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이고 최초의 생각은 <>라는 생각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Ego인데, 바로 이 에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되고, 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때에는 마음이 사라져도 호흡은 가라앉지 않는다. 이것은 신의 뜻이다. 그럼으로써 육체가 유지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 육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는 상태와 삼매상태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 된다. 호흡은 거친 형태의 마음이다. 마음은 죽기 전까지 육체 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며, 죽음과 동시에 호흡을 가지고 가버린다. 따라서 호흡조절 훈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호흡조절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한다든가, 만트라를 외운다든가, 음식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하거나 만트라를 외우는 것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잡다하게 있으면 생각 하나하나의 힘은 약해지지만 한 생각만 있으면 마음이 집중되어 그 힘이 강해진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자아탐구自我探求가 쉬워진다.

,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지켜야할 것 중에는 과일야채 등 채식을 위주로 하는 적당한 식사법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도 자아탐구에 도움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면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계속 탐구해 들어감으로써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하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마치 다른 장작들을 다 태운 뒤에 스스로도 타버리는 불쏘시개 장작처럼 사라지는 때가 온다. 그러면 그때 깨달음이 드러난다.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1인칭이 있고 난 연후에 2인칭과 3인칭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느 때에 현상계가 사라지는가?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마음이란 진아 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또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잘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따라서 현상계도 없다. 그러나 깨어있을 때나 꿈꿀 때에는 생각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도 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바깥으로 현상계를 투사 했다가 다시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으며 진아가 나타날 때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진아가 바로 아트만Atman이다.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어느 때에 진아眞我(진정한 나)를 깨달을 수 있는가?

현상계現象界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객관 세계, 대상 세계, 주관과 분리된 객관으로서 인식되는 세계, 여기에서는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 이 물질 세계는 물론이고, 여러가지 의식 차원에서 객관화되어 나타나는 모든 현상 세계를 통틀어서 의미 한다.

예컨데 불교식으로 설명한다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를 통틀어서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때로는 좁은 의미로, 물질세계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현상계가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한은 진아를 깨달을 수 없다.

 

현상계가 실재 한다는 인식과 진아에 대한 깨달음과의 관계는 뱀과 밧줄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길을 가던 사람이 떨어진 밧줄을 뱀이라고 잘못 오인하는 경우). 그 뱀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밧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진아를 깨달을 수 없다.


<>는 누구인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 하는 다섯 가지 운동 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프라나prana등의 다섯 가지 기는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 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니다> 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 보는 [순수한] (Awareness)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순수한] 앎이 <진정한 나>, <진아>. 그러나 이 [순수한] 앎이라는 표현은 진아의 세가지 측면인 실재實在· 의식意識· 지복至福 중에서 의식의 측면이 강조된 표현이다.


진아 찾기는 고행이나 계율에 있지 않다.

가족을 버리면 어디로 가겠는가? 하늘로 올라가겠는가? 그래도 결국 다시 땅위로 내려와야 되지 않겠는가? 어디를 가더라도 가족은 항상 있게 마련이네. 나 역시 아무것도 원치 않아서 집을 떠나 여기 와 있지만, 보게, 내 가족은 얼마나 많은가? 아마 내 가족은 자네 가족보다 백 배는 많을 것이네.


있는 상태 그대로에서 진아가 드러난다.

사람들은 매우 열심히 수행을 함으로써 어느 날엔가 진아가 그들 머리위에서 거대하고 크나큰 영광으로 내려와서 소위 깨달음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아는 매우 직접적임에도 그것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있는 상태 그대로 그냥 머무름으로써 진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세 가지 의식 상태로 구성된다. , 깨어 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가 그것이다. 진아는 이 세 상태를 모두 초월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상태에서나 항상 체험될 수 있는 불변의 실체다.

인간들이 진아를 모르는 이유는 그릇된 동일시同一視 때문이다. 인간들은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마음, 즉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마음의 세계를 벗어나야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는데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아탐구Self-enquiry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헌신의 길이다. 자아탐구의 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몰입하여 마침내 마음의 세계를 벗어난 진아에 이르는 길이고, 헌신의 길은 자기의 모든 것을 절대자, 즉 신에게 완전히 맡겨 버리고 마음, 즉 에고와는 전혀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는 길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처리해 나가면서 주의注意를 내면으로 돌리는 것, 그것이 라마나의 가르침이었다.


실재-의식-지복

실체만이 실재Sat하며 그것을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또 이 실체의 빛이 의식Chit이며 실체의 본질이 지복Ananda 이다. 이 셋을 함께 실재-의식-지복이라고 한다. 우리의 본질은 바로 행복이다. 진아는 완전한 행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행복만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깨달아 진아 안에 머물면서 영원히 지복을 누리도록 하라. 그 무한한 행복의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결국 진아를 깨달아야 한다.

 

어떻게 자유를 얻을 것인가

자유는 우리들의 본성이다. 우리가 곧 자유다. 자유란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구속되어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없애기만 하면 되며, 그렇게 할 때 거기에는 아무런 욕망도, 아무런 생각도 없게 되지만,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 한은 스스로 구속되게 된다.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

<깨닫는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진아는 항상 그대로 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물을 파면 구멍이 생기는데 그 구멍 속의 공간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간을 채우고 있던 흙을 옮겼을 뿐이다. 그 공간은 그때, 거기에 있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곳에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들의 내면에 쌓여 있는 오래되고 낡은 축적물을 밖으로 던져내기만 하면 된다. 그것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을 때, 진아만이 홀로 빛날 것이다.


진아는 곧 침묵이다.

진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각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침묵뿐이다.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상태가 침묵이며 존재 그 자체가 침묵이다. 어떻게 언어로서 침묵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에고)>라는 생각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진아만이 존재하는 상태가 침묵이라고 성인들은 말씀하셨다.


진아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보게 되나?

깨달음의 상태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지금 존재하고 또 항상 존재하여 왔던 그 상태로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다만 진실 아닌 것을 진실로 고집하지만 않으면 된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이지 무엇을 안다거나 무엇이 되는 상태가 아니다. 깨닫게 되면 항상 하나인 채로 있고, 항상 하나인 채로 있어왔던 바로 그것이 된다.


지금 당장 여기서 진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

이원성二元性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앎>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나뉘어져 있지만 <진아의 앎>은 절대적이며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초월해 있다. 사람들은 진아를 마치 번갯불과 같은 걸로 보고자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며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가장 훌륭한 정의가 있다면 <나는 나로서의 나>라는 정의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냥 실재할 뿐.


[순수한] 앎이란 무엇인가?

그대가 바로 [순수한] 앎이다. [순수한] 앎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바로 [순수한] 앎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거나 키워 나가야 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진아가 아닌 것들을 진아로 오인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때에 [순수한] 앎만이 남으며 그것이 바로 진아다.


무엇이 실체인가?

항상 실재하는 것만이 실체다. 그것은 형태도 이름도 없지만 모든 형태와 이름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실체는 있는 그대로 이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 있으며 <존재, 비존재> 등의 표현조차 넘어서 있다.

실체란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무지가 사라진 뒤에 남아 있는 단순한 의식이며 그것이 바로 진아다. 이 실체가 외면으로 나타난 모습이 바로 침묵인데, 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한 지혜의 최종적 상태이며 어떠한 것에도 방해 받지 않는 상태라고 선언하고 있다.


자신의 절대적 실체를 깨닫는다는 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대가 알고자 원하는 진아는 진정 그대 자신이다. 진정한 지혜란 그대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대의 무지를 제거할 뿐이다.

또한 그대의 본성에 지복이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지복은 이미 그대의 본성이며,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 본성이 그대에게 드러날 뿐이다. 슬픔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진아를 알고 진아가 되는 길이다. 왜 그대에게 그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장애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자유다. 우리는 항상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구속되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애쓰며 발버둥치고 있다.

 

우주의식의 섬광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 체험은 번뜩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시작이 있는 것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항상 존재하고 있는 의식을 깨달았을 때에만 그 깨달음이 영원하며 그 의식은 진정 언제나 우리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육체가 곧 나>라는 느낌이며, 이 그릇된 <>라는 느낌이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는 항상 존재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새롭게 나타나지도 않으며 다시 사라지지도 않는다. 궁극적인 진리란 지극히 단순하다. 그것은 원래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이 이상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해탈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

해탈이란 미래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 여기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실체가 행복이며 행복이 실체다. 해탈Mukti이라는 말은 매우 혼동을 일으킨다. 왜 해탈을 추구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뭔가 구속이 있고 그래서 자유를 찾게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진정 구속이란 없으며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 왜 억지로 이름을 만들어 내서 그 이름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진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진아는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진아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무지란 진아를 육체, 또는 마음과 동일시 하는 것이며 이 그릇된 동일시가 사라지면 진아만 남는다.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이 바로 장애다. 그 장애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라.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진아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란 없다.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나 의심이 남아 있는 한, 그것들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계속 되어야 하며, 그것들은 <진아 아닌 것>을 진아와 잘못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깨달은 사람들은 어린이와 같다.

어린이들은 어떤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만 그 상황에 관심을 가지며, 상황이 지나가 버리면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에게도 욕망이 있을까?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순수한 조화를 이루고 특정한 틀이 없으며 미묘한 지혜의 흐름 안에서 작용한다. 그는 그와 같은 마음을 통해서 세상과 접촉하기 때문에 그의 욕망도 역시 순수하다.

현상계는 진아와 다르지 않지만 진아의 일부분도 아니다. 그는 항상 깨어있는 상태다. 그는 영원한 진아에 대해서 깨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항상 꿈꾸는 상태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꿈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항상 잠자는 상태다. 그에게는 언제나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행위자라는 생각 없이 그 행위들을 해 나간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깨닫지 못한 사람이란 없다. 깨달은 사람은 자유도 구속도 의식하지 않는다.


대상과 연관 지으려는 에고의 습성

에고가 대상과 연관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그 연관이 바로 무지이며 그 연관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다. 대상과 연관 지으려는 에고의 습성이 사라지면 에고는 순수한 채로 남으며 근원으로 녹아 들어간다.

 

죽은 마음

<죽은 마음>을 통해서 아트만을 깨달을 수 있다. <죽은 마음>이란 생각이 없는 마음이요, 내부로 향해진 마음이다. 그때 마음은 마음의 근원을 보며 그 근원(진아)이 된다. 이는 주관이 객관을 지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방이 어두울 때는 사물을 분간하기 위해 등불이 필요하지만 태양이 떠오르면 등불은 필요치 않다. 또 태양을 보기 위해서는 등불을 켤 필요가 없이 환히 빛나는 태양쪽으로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상계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반사된 빛이 필요하지만 가슴을 보기 위해서라면 마음을 가슴쪽으로 향하게만 하면 된다. 그러면 마음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가슴이 밝게 빛난다.

생각과 망상의 작용을 하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 바로 탄생과 죽음의 순환인 윤회이며, 생각과 망상의 작용이 사라진 상태의 진실한 <>만이 순수한 자유다. 순수한 <>에는 탄생과 죽음의 원인이 되는 <진아에 대한 망각>이 없다.


<나라는 생각>의 형태를 가진 에고

그대는 순수한 <><나라는 생각>을 구별해야 한다. 후자는 단순히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을 나누며, 자고, 깨고, 먹고, 생각하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순수한 <>는 순수한 실체이며 영원한 실체이고 무지와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만약 그대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의 실체로서만, <>로서만 머무를 수 있다면 <나라는 생각>은 사라질 것이며 망상은 영원히 소멸될 것이다. 영화를 볼 때, 매우 희미한 빛 속에서나 어둠 속에서는 화면들을 볼 수 있지만 빛이 환하게 들어오면 화면들을 볼 수 없다. 지고의 아트만이 환하게 빛나는 속에서는 모든 대상이 사라진다.


"헌신 Devotion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절대적인 헌신과 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다. 둘 중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둘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혜의 길과 헌신의 길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그리고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이 두 길을 분별하지 말고 그냥 따르도록 하라."


진아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는데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느낌이 깨달음에 대한 장애물이다. 사실은 이미 깨달아 있으며 더 이상 깨달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깨달음은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라면 새로 생겨야 하며, 새로 생기는 것이라면 결국 또 없어질 것이다.

깨달음이 영원하지 않다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 영원하지만 단지 장애물에 가려서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단지 장애물만 제거하면 된다.

그리고 장애물이란 무지다. 무지만 제거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그대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는지를 묻고 있는데 시작도 끝도 없다. 바로 그대 자신이 시작이며 끝이다.


<그릇된 나>를 없앨 수 있는가?

<그릇된 나>를 없앨 필요는 없다. 어떻게 <><>를 없앨 수 있겠는가? <>의 근원을 찾아 그 근원에 머무르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거기까지만 노력을 통해서 갈 수 있으며 그 이상은 저절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거기에서부터는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어떠한 노력도 할 수 없다.


진정한 복종이란

그는 진정한 복종이란 신과 인간 사이의 주-객 관계를 초월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종이란 신과 분리되어서 신에게 복종하는 그 사람이 사라졌을 때에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두 가지의 수행 방법을 제자들에게 권하였다.

1) 자기는 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그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나라는 생각>에 몰입하는 방법

2) 자기 일생의 모든 책임을 완전히 신, 또는 진아에게 맡겨버리는 방법, 이러한 자아복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갖지 말아야 하며, 신과 따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개체적 자아가 실재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신과 스승의 관계

"사실상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호랑이의 입안으로 굴러 들어간 먹이가 다시 도망칠 수 없듯이, 스승의 은총이라는 찬란한 빛 아래로 다가온 제자는 결국 구원을 얻게 되며, 버림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제자가 스승이 제시하는 길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스승의 관점에서 보면 제자란 존재 하지 않지만, 제자의 관점에서 보면 스승의 은혜는 바다와 같다. 그러나 컵을 가지고 스승에게 가는 제자는 스승에게서 컵만큼을 얻을 것이다. 바다의 인색함을 탓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릇이 크면 클수록 많이 담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제자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영원불변의 진아

진아는 다른 곳에서 오지도 않으며 숨구멍을 통해서 육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항상 있는 그대로이고, 끊임없이 빛을 발하며, 영원하고, 움직이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그 불변의 진아로부터 파생된 마음, 또는 육체에 자기 자신을 한정 짓고 있다. 이 그릇된 동일시를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영원히 빛나는 진아가 유일한 실체로서 드러날 것이다.


실체에 대한 체험

"실체에는 아무런 단계도 없다. 다만 각 개인의 실체에 대한 체험에 단계가 있을 뿐이다. 또 누가, 무슨 체험을 하더라도 그 체험자는 똑같은 하나다."

"누구나 진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진아는 각자가 상상하고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그 길을 가는 사람에게만 도움을 주는가?

그는 어떤 길을 가는 사람에게도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다. 정상에 도달한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의 자기가 올라왔던 길로 올라오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을 좋아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꼭 그 길로만 올라오라고 한다면 그는 잘 올라올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길을 따라서 올라오더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올라오는 길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길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이미 정상에 올라와서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길을 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약간 움직이라거나 함정을 피하라고 알려 줄 수 있다. 목적지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요가와 자아탐구의 차이

요가에서는 생각을 억압하라고 하지만 나는 자기 자신을 탐구해 보라고 한다. 진정으로 마음을 넘어서는 데에는 단지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마음의 근원을 찾든지, 아니면 절대자에게 완전히 복종하라.

만약 마음이 근원으로 향하기를 거부하면 마음이 흘러가는 데로 내버려두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내면으로 향하게 하라. 꾸준한 인내 없이는 아무도 성공할 수 없다.

 

진정한 출가란

표면적으로 가족이나 사회 규범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애증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사람은 세상 속으로 스며들면서 자신의 사랑을 우주 전체로 확산시킨다.

진정으로 신에게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포기라는 말보다는 사랑과 애정의 확산이라는 말이 훨씬 더 좋은 말이다. 왜냐하면 욕망을 버린 사람은 계급이나 민족의 한계를 넘어서 더 넓은 범위에까지 사랑과 애정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구도자라면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이 싫어서 집을 떠나고 세속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집을 떠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의 때가 오면 집을 떠나려고 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다 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 이전에 집을 떠나거나 직장을 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깨달음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

자신이 바라지 않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 그리고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정도가 진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다.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운명을 정복하거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누구에게 그 운명이 나타나는지를 탐구하여 운명에 의해서 영향 받는 것은 에고일 뿐 진아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과 결국 에고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신에게 완전히 복종하여 에고를 죽이는 방법이다.

이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고 언제나 ', 신이여 제가 아니고 당신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나의 것'이란 느낌을 완전히 포기하고 신이 그대를 통해 하고자 하는 대로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는 방법이다.

만약 신에게 이것저것을 바란다면 그런 복종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진정한 복종이란 신에 대한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서 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자유조차도 바라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운명을 정복하려면 에고를 없애야 하며 에고를 없애기 위해서는 자아 탐구의 길이나 헌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원한 삶에 관하여

진아眞我를 잊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삶이다. 그대는 영원한 삶을 바란다. ? 현재의<상대성 속의> 삶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참된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진실로 순수한 영[]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육체와 동일시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한 투사물<객관화된 생각>이며, 마음 또한 그 순수한 영에서 나온 것이다. 단순히 몸을 바꾸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다. 왜냐하면 단지 에고Ego가 새로운 몸으로 옮겨갈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 삶인가?

 

그것은 <의식으로서의> 존재이며, 그것은 그대 자신自身이다. 그것이 참된 삶이며, 그것은<시간을 넘어서>영원하다. 육체 안에서의 삶은 조건 지워진 삶이다. 그러나 그대는 조건 지워지지 않은 삶이다. 만약 "나는 육체다"하는 생각이 죽으면, 그대는 조건 지워지지 않은 삶으로서의 그대의 참된 성품을 회복回復할 것이다.


순수한 진아(眞我)에 머물 수 있을까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를 따지지 말고 진아에 대한 명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설사 큰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될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하여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우선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모든 힘을 기울여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선한 마음이 따로 있고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세속적인 대상이나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에 쏠리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에게 나쁘게 대해도,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욕망과 증오는 둘 다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남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자신의 자아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자아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또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어디에서든 살 수 있게 된다.

마음속에 대상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가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이 탐구를 통하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진아를 깨달을 때까지 완전히 진아에 몰입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요새 안에 적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언제고 다시 공격해 오겠지만, 나타나는 족족 없애 버리면 요새는 결국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진아(眞我)를 실천하는 수행

자기 자신을 진아, 즉 신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자기 자신을 신에게 던진다는 말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진아 안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신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 지고한 신의 힘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 왜 우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는가?

기차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운반해 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왜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생각이 일어날 때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그 생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무집착이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에 내려가서 진주를 캐오듯이 우리는 무집착을 달고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진아라는 진주를 캐내야 한다.

 

신과 스승은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지 벗어난 상태를 주지는 않는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일단 호랑이의 입 속으로 들어온 먹이는 다시 빠져 나갈 수 없듯이, 일단 스승의 자애로운 은총 속으로 들어온 제자는 스승에 의해 구원 받게 되어 있다. 물론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 자신의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깨어 있는 상태는 길고 꿈꾸는 상태는 짧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 상태에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꿈꾸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꿈꾸는 상태에서 마음은 다른 체(body)를 가진다. 또 어느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사라질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계속 탐구해 들어감으로써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하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마치 다른 장작들을 다 태운 뒤에 스스로도 타버리는 불쏘시개 장작처럼 사라지는 때가 온다. 그 때 깨달음이 드러난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방법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 마음을 조절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호흡조절을 통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흡이 조절되는 동안만이며 호흡이 흐트러지면 마음이 다시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이고 최초의 생각은 <>라는 생각이며 바로 에고인데 바로 이 에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되고, 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때에는 마음이 사라져도 호흡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신의 뜻이다. 그럼으로써 육체가 유지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 육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는 상태와 삼매상태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된다. 호흡은 거친 형태의 마음이다.

 

마음은 죽기 전까지 육체 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며, 죽음과 동시에 호흡을 가지고 가버린다. 따라서 호흡조절훈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호흡조절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한다든가, 만트라를 외운다든가, 음식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하거나 만트라를 외우는 것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잡다하게 있으면 생각 하나하나의 힘은 약해지지만 한 생각만 있으면 마음이 집중되어 그 힘이 강해진다. 이러한 마음상태에서는 자아탐구가 쉬워진다.

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 중에서 과일야채 등 채식을 위주로 하는 적당한 식사법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도 자아탐구에 도움이 된다. 오직 진아만이 실재하면 현상계, 개아, 신 등은 진아 안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진아는 <>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 곳이며 <침묵>이라고도 한다. 진아가 곧 현상계이고 진아가 곧 개아이며 진아가 곧 신이다. 진아는 모든 것이다.


마음의 본질

마음이란 진아 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또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잘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따라서 현상계도 없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나 꿈꿀 때에는 생각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도 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바깥으로 현상계를 투사했다가 다시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으며 진아가 나타날 때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진아가 바로 아트만 Atman이다.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1인칭이 있고 난 연후에 2인칭과 3인칭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진아眞我(진정한 나)를 깨달으려면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모은 내가 아니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프라나 등의 다섯 가지 기()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각성(覺性)(Awareness)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그것의 본질은 실재實在(Sat)-의식意識(Chit)-지복至福(Ananda)이다.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과 진아에 대한 깨달음과의 관계는 뱀과 밧줄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 뱀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밧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진아를 깨달을 수 없다.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마음의 (참된) 본질(essence)

아뜨만(atman)은 죽은 마음(mruta manas, dead mind), 즉 생각들이 비워지고 내면으로 향해진 마음을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은 그 자신의 근원을 보며, 그 근원[진아]이 됩니다. 이는 주체가 대상을 지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방이 어두울 때는 등불을 밝혀야 눈으로 사물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사물을 보는 데 등불은 필요치 않습니다. 또 해를 보기 위해서는 등불을 켤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빛나는 해를 향해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반사된 빛이 필요하지만, 심장心藏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심장을 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심장이 밝게 빛납니다.

마음의 (참된) 본질(essence)은 오로지 자각, 곧 의식입니다. 그러나 에고가 마음을 지배할 때에는, 마음은 따지고 생각하며 느끼는 기능으로 작용합니다. 우주적 마음(cosmic mind)은 에고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므로 그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오로지 자각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I am that I am)라고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자기 진아의 지고의 의식 안에서 마음이 소멸되면, 애착의 힘(power of liking) [여기에는 행위하는 힘(power of doing)과 아는 힘(power of knowing)이 포함된다]을 위시한 여러 가지 힘들이 완전히 사라지며, 그것들이 자신의 의식의 형상 속에 나타난 비실재적인 상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생각과 망각의 작용을 일으키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 바로 탄생과 죽음의 순환인 윤회輪廻(samsara)입니다. 생각과 망각의 작용이 사라져 버린 진정한 ''만이 순수한 해탈입니다. 거기에는 생사의 원인이 되는 진아망각(pramada)이 없습니다.


마음의 궁극 원인(ultimate cause) 또는 본체(noumenon)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가치에 따라 순서를 매길 때, ''라는 생각이 가장 중요한 생각입니다. 개인성의 관념 또는 생각은 또한 다른 모든 생각들의 뿌리 내지는 줄기에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생각은 어떤 개인의 생각으로서 일어나며, 에고와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에고가 사고 활동을 전개합니다.

2인칭과 3인칭[, , 그것 등]1인칭[] 없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1인칭이 나타난 다음에야 나타나기 때문에, 결국 이 세 가지는 같이 일어나고 같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 또는 개인성의 궁극 원인을 한 번 추적해 보십시오. ''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것을 내면에서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지혜의 추구(pursuit of wisdom)입니다.

마음이 그 자신의 본질을 쉬지 않고 규명해 들어가면, 결국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직접적인 길입니다. 마음이란 생각들에 불과하며, 모든 생각들 중에서 ''라는 생각이 그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결국 ''라는 생각일 뿐입니다. ''라는 생각의 탄생이 곧 한 개인의 탄생이며, ''라는 생각의 죽음이 곧 그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 육체와의 그릇된 동일시가 일어납니다. ''라는 생각을 제거하십시오. ''가 살아있는 한 괴로움(grief)이 있습니다. ''가 존재하지 않게 되면 괴로움이란 없습니다.


마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마음은 ''라는 생각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과 에고는 똑같으며, 지성, 기억 등의 다른 정신 작용들도 바로 이 마음입니다. 마음(manas), 지성知性(buddhi), 장식藏識(원습의 저장소, chittam), 에고(ahamkara), 이 모두가 단 하나인 마음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을 그의 여러 가지 지위에 따라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적 영혼(individual soul, jiva)이라는 것은 이 마음, 즉 에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인(sage)은 어린아이와 같다.

어떤 점에서 어린아이와 진인(jnani)은 흡사한 데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떤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만 거기에 관심을 가지며, 상황이 지나가 버리면 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상황들이 아이한테 어떤 인상도 남기지 않으며, 아이도 상황들에 의해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진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진인의 감각과 육체아(肉體我)의 관념

진인 역시 감각도 있고 육체아(肉體我)의 관념도 있습니다. 그 관념 자체는 진인이나 범인이나 다 있지만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범인은 육체만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진인은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는 것(all is of the Self), 즉 이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어도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것 역시 자기의 일부입니다. 진아는 완전합니다. 인간은 육체아(肉體我) 관념을 넘어설 때 진인이 됩니다. 그 관념이 없으면, '행위한 것'(kartritva)'행위한 자'(karta)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인에게는 업(karma)이 없다 [, 진인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인이 체험하는 바이며,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그는 진인이 아닙니다. 범인은 진인을 그의 육신과 동일시하지만, 진인은 그러지 않습니다.


속박된 자(baddha)와 해탈한 자(mukta)의 차이

보통 사람들은 심장心藏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은 모른 채 머릿속에서 살고 있지만, 진지 성취자(jnana siddha-진인)는 심장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과 사물들에 접하면서도, 그가 보는 모든 것이, 그의 심장 가운데서 그 자신의 진아이자 실재로서 그가 깨달은 유일한 지고의 실재, 즉 브라만(Brahman)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밖에 있는 사물들만 본다고 방금 말했습니다. 그는 세계와 분리되어 있으며, 그와 그가 보는 것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그 자신의 보다 깊은 진리(진아)와도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존재라는 지고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과 세계의 배후에 유일한 지고의 실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영원하지 않고 변하기 쉬운 일체의 개아個我와 만물 속에, 영원불변의 유일한 실재, 즉 진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에고는 없습니다(Ego is not).

에고는 없습니다(Ego is not).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두 개의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까? 에고가 없다면 무지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대가 탐구해 보면, 본래 존재하지 않던 이 무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거나, 혹은 그것이 도망가 버렸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무지는 에고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왜 그대는 에고를 생각하면서 고통을 받습니까? 도대체 무지란 무엇입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무지입니다. 그러나 세간적 삶은 무지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무지는 단지 우리 (마음)의 무지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아를 모르는 것 혹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태양 앞에 어둠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분명하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진아 앞에 무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진아를 알게 되면 어둠도 없고 무지도 없으며, 아무런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괴로움과 불행을 느끼는 것은 마음입니다.

어둠이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습니다. 해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어둠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진아를 바라보면 무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진아가 있는 곳

진아에 도달한다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만약 진아에 도달해야 한다면, 진아는 지금 여기 없으며 획득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새로이 얻은 것은 언젠가 잃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은 것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아는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바로 진아이며, 그대가 이미 그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지복에 넘친 상태를 모르고 있습니다. 무지無知(ignorance)가 계속 나타나서 지복 그 자체인 순수한 진아 위에 하나의 막(veil)을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릇된 앎이라고 하는 이 무지의 막을 제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그릇된 앎이란 자기(진아)를 육체 및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그릇된 동일시가 사라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진아 만이 남게 됩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깨달음은 공부인들 간에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과,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 자체가 장애물입니다. 이 장애물로부터도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참된 성품이 행복 또는 지복이다.

완전한 지복이 브라만이며, 완전한 평안이 진아의 평안입니다. 그것만이 실재하며 이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진아의 성품이며, 진아는 완전한 행복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직 행복만이 존재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진아의 상태에 안주하면서 영원히 지복을 누리도록 하십시오.

만약 인간의 행복이 외부적인 원인이나 재산에 의해서 좌우된다면, 재산이 많아질수록 더 행복해지고 재산이 적어질수록 덜 행복해져야 할 것이며, 재산이 하나도 없다면 그의 행복은 전무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경험은 어떻습니까? 과연 이러한 견해에 부합합니까?

사람은 깊이 잠들었을 때 아무런 재산도, 그의 육신조차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기는커녕 매우 행복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깊이 잠들고 싶어 합니다. 결국 행복이란 인간 속에 내재해 있으며, 외부적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순전한 행복(unalloyed happiness)의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누구나 진아를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과 진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마음이 내부로 향하면 곧 진아요, 외부로 향하면 에고와 모든 세계(the world-현상계)가 됩니다. 같은 솜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옷들을 우리는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며, 금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장신구들을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것들은 결국 같은 솜이며 같은 금입니다. 한 가지가 실재할 뿐, 그 외의 여러 가지 것들은 다만 이름과 형상(names and forms)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진아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독립된 존재성이 없습니다. 진아는 마음 없이도 존재하지만, 마음은 진아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한 사람의 바라보는 자(witness)

*무대 위에 켜진 등불의 예*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등불은 항상 그곳에 켜져 있으면서, (그 배역이) 왕이든 하인이든 무희舞姬, 모든 배우와, 모든 관객들을 차별 없이 고루 비추어 줍니다. 그리고 그 등불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이고, 연극이 시작되기 전이나 연극이 끝난 뒤에도 항상 그곳에 켜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등불인 진아도 그 자신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면서 에고, 지성, 기억 그리고 마음에게 빛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나 (그와 유사한) 어떤 상태에서는 에고의 느낌이 전혀 없는데, 저 진아는 다른 속성 없이(attributeless) 남아 있으면서 계속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사실 진아가 '바라보는 자'라는 관념은 단지 마음속에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진아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바라봄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서 상대적입니다. 바라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 둘 다 마음의 창조물(mental creations)입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buddhafind/221112727978 |작성자 목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