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제 1장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此兩者同, 出而異名(차양지동 출이이명)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요지문
길을 길이라함은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생이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에서 나와서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그 길을 가믈타고 한다.
가믈코 또 가믈토다.
뭇 묘함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
왕필 (王弼)에 대하여--------
왕필은 |
중국 삼국시기 위나라 사람이며, 산양 가오평에서 태어났다. 字는 보사이며 상서랑을 지냈다. 위진 현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유가와 도가를 회통하는 현학적 시각으로 18세에 「노자주」를, 20대 초반에 「주역주」를 지어 이름을 떨치다 2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저서로는 「노자주」「주역주」「논어석의」가 남아있다
18세에 『노자주』를 쓰다
왕필이 살았던 당시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무대가 된 시기로 위 촉 오 삼국 사이에 생사를 건 전쟁이 계속되었고, 사회 전체에는 부화(浮華)한 말폐가 만연해 있었다. 한말 동중서적(董仲舒的)인 명교(名敎) 체계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고, 새로운 사회질서와 이 질서를 뒷받침할 만한 사상체계는 아직 수립되지 못했다.
왕필은 한말 대제국의 피폐와 붕괴, 대규모의 농민반란과 삼국의 하극상적 발호와 무질서를 목도하면서, 당시 시대적 혼란을 구제할 수 있는 근본적 방안을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갖게 되었다. 당시는 한대의 명교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 하나의 시대사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왕필의 사상도 이런 시대 사조의 영향 아래 생겨난 신사상이었다.
그가 문제로 삼았던 것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는 특히 명교의 근원과 근거문제를 추구했다. 이런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 위에서 욕망의 소종래(所從來)와 명교의 소이연(所以然) 문제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참된 도가 무엇인지를 찾았다.
왕필은 이런 문제의식을 통해 무를 근본으로 하는 철학체계를 수립했다. 사회철학적으로 그는 현실의 변화에 대한 시의적절한 대응과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무의 관념을 통해 어지럽게 동탕(動蕩)하는 세계를 평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무의 추구는 한나라의 거대하고 복잡한 명교체제와 번망했던 한대 경학(經學)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도출된 철학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장의 무위자연의 도와 주역의 변화와 시의(時義), 그리고 간이의 관념을 종합하여 도출한 근원적 일자로서의 무 관념을 철학적 원리로 하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이는 한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예교 질서에 대해 간이하면서도 보편적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위진현학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왕필은 위진현학가로서 예로부터 비판이 있었고, 노장사상적인 측면 때문에 일부에서 이단시되어온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왕필은 주자나 왕양명과 나란히 중국의 공자 문묘에 종향되는 48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이래로 숙종 때까지 문묘에 종사되었던 점을 상기해보면, 예로부터 중요한 인물로서 숭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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