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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마음의 속성

별꽃바람 2018. 6. 9. 15:03

불교에서 마음의 속성

 

 

여기서 마음이란 과학적 근거를 앞세운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불교 입장에서 바라본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은 둥글다든지 허공과 같다는 등의 수식이 가능한 것이다.

 

한 말 경허(鏡虛, 1849~1912) 선사는 마음은 둥글다고 했다.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또다시 이 무슨 물건이 있으리요(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이 글은 경허 선사의 임종게(臨終偈)이다. 그런데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呑萬像)-마음 달 홀로 둥글어 그 빛이 삼라만상을 삼키도다.라는 첫 구절은 중국 당나라 때의 반산 보적(盤山寶積) 선사의 게송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경허 선사가 보적 선사의 게송이라는 것을 모르고 차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장합의 자기 심정이 그러했기에 보적 선사의 게송 첫 구절을 차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달로 표현한 글들은 많다. 그러나 달을 표현 글 중에 이 구절이야말로 실로 압권이다. 이 달은 하늘에 구름이 있고 별이 있는, 그리고 산 아래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에서의 달이 아니다. 오로지 달 하나뿐인 장면이다. 하늘에 이 마음 달 하나만 둥그렇게 떠 있음이다. 그런데 그 빛이 천지만물과 삼라만상들을 다 머금어버렸다. 천지만물과 달이 하나가 된 것이다. 달빛은 무엇을 비추는 일도 없다. 빛을 받을 경계가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빛과 그 빛을 받을 경계가 다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기에 새삼스럽게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는가.

 

거기에는 언어가 다 끊어지고 숨도 멎고 마음도 멎은 경계이다. 이 불경(佛境), 이 선경(禪境)을 어떻게 이해하며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그런 그 속으로 나는 들어간다. 그런 심정으로 경허 선사께서 임종게를 읊으며 마음이 둥글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는 마음의 속성에 대해, “마음의 법은 모양이 없어서 온 시방 세계를 꿰뚫으니, 눈에 있을 때에는 본다 하고, 귀에 있을 때에는 듣는다 하고, 코에 있을 때에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에는 말한다고 하고, 손에 있을 때에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에는 걷는다고 한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고려 보조국사 지눌(知訥) 선사는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 마음을 무저발(無底鉢) 혹은 몰현금(沒絃琴)과 같다고 했다.

 

무저발이란 밑이 없는 발우(鉢盂)란 뜻이다. 발우가 밑이 있으면 담는데 제한이 있고 한계가 있다. 그러나 마음은 무한하기 때문에 밑 없는 발우처럼 무한히 담을 수 있다. 무저발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 몰현금(沒絃琴)이다. 몰현금이란 줄이 없는 거문고라는 말인데 줄이 없으므로 무한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줄이 있다면 줄이 가지고 있는 소리밖에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당나라 때의 황벽(黃壁希運, ?~850) 선사는 일심법(一心法)의 종풍을 드날리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다. 마음 밖에서 불도(佛道)를 구하거나 부처의 성품(佛性)을 찾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임을 그의 저서 <전심법요>를 통해 시설하고 있다. 어디 황벽 스님뿐이겠는가. 당대의 모든 선지식들은 이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 평소의 일상적인 마음 밖에서 불법(佛法)의 진리를 찾는 것은 모두 그릇된 것임을 한결같이 주장했다.

 

그리고 <보적경(寶積經)>에는 마음의 여러 가지 모습을 말하고 있다.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아득하게 되는 것은 어떤 마음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과거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미래의 마음이라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마음이라면 머무르는 일이 없다.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형체가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할 수 없고 이름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마음은 어떠한 여래도 일찍이 본 일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장차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 작용은 어떤 것일까.

마음은 환상과 같아 허망한 분별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마음은 바람과 같아 멀리 가고 붙잡히지 않으며 모양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멈추는 일 없이 나자마자 곧 사라진다.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 인이 있어 연이 닿으면 불이 붙어 비춘다.

마음은 번개와 같아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에 소멸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 뜻밖의 연기로 더렵혀진다.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움직인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

마음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마음은 혼자서 간다.

두 번째 마음이 결합돼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왕과 같아 모든 것을 통솔한다.

마음은 원수와 같아 온갖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마음은 모래로 쌓아올린 집과 같다.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쉬파리와 같아 더러운 것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낚싯바늘과 같아 괴로움인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적과 같아 항상 약점을 기뻐하며 노리고 있다.

마음은 존경에 의해서 혹은 분노에 의해 흔들리면서 교만해지거나 비굴해진다.

마음은 도둑과 같아 모든 선근을 훔쳐 간다.

마음은 불에 뛰어든 부나비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한다.

마음은 싸움터의 북처럼 소리를 좋아한다.

마음은 썩은 시체의 냄새를 탐하는 멧돼지처럼 타락의 냄새를 좋아한다.

마음은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리는 종처럼 맛을 좋아한다.

마음은 기름접시에 달라붙는 파리처럼 감촉을 좋아한다.

이와 같이 남김없이 관찰해도 마음의 정체는 알 수 없다. ,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속성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이다.

마음은 무상하다.

마음은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 한다.

마음은 흐름이다.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마음은 연이생(緣起, 조건발생)이다.

마음은 변한다.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마음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세 가지 생각을 못한다.

 

그 대신 한 가지 생각은 다음 한 가지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것이 마음의 흐름이다. 이와 같이 앞생각과 뒷생각이 인()과 연()이 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 한다. 등무간연으로 앞생각이 없어지면서 뒷생각을 발생시키므로 뒷생각의 뿌리가 앞생각이 된다. , 연속하는 마음 활동에서 뒷생각은 앞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 결과가 되는 것을 증상과(增上果)라고 한다.

 

마음의 속성이 이와 같으므로 마음을 절대화하면 안 된다. 그건 불교가 아니고 외도다. ‘절대라는 말은 복종과 순종, 충성, 믿음의 대상이지 깨달음은 아니다.

 

불교의 믿음은 불승에 대한 믿음으로 족하다. 무상무아와 연이생(緣而生-연기 됨)을 보는 것이 해탈이다.

 

따라서 무상무아는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불교가 추구하는 진리가 오리무중이 된다.

 

이 처럼 마음뿐만 아니라 모든 법()들은 무상(無常)하다. 그래서 초기경전 <증지부>에서는 마음의 무상성(無常性)을 이렇게 표현한다.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citta)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A.i.9)”

 

마음은 생겨서 대상을 인지하는 본래 기능을 다하면 소멸한다. 이렇게 매 찰나 찰나 마음은 일어나고 변하고 사라진다. 그래서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無我]이며,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비담마에서는 찰나생 찰나멸로 규정하고 있으며, 심찰나(心刹那, citta-kkhana)라는 말을 즐겨 쓴다. ,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기간을 심찰나라 한다. 그래서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사이에 마음은 960번 일어났다가 소멸한다고도 한다. 마음은 너무 빨리 생멸하기 때문에 생멸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음은 앞 심찰나에 조건 지워져서 일어난다[등무간연(等無間緣)]. 한편 마음은 과거의 심찰나에서 지은 업의 결과로도 일어나는데, 이를 업연(業緣)이라 부르며, 이때 일어난 마음을 이숙식(異熟識, 과보의 마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아비담마 불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존재를 법()들의 흐름(相續, 빠알리어 santati)으로, 찰나의 연속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러함에 대해, 마음이 찰나생 찰나멸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돼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는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citta-srota) 혹은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북방 불교에서 공히 강조하고 있다. 마음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으로 대표되는 탐치가 다할 때 까지 흐르는, 상속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마음의 상속은 전찰나(前刹那)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찰나(後刹那)의 마음이 일어나고 이 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 후후찰나(後後刹那)의 마음이 일어나고 이렇게 쉼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등무간연(等無間緣)].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과거심도 불가득(不可得)이요, 현재심도 미래심도 불가득이라고 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과거의 마음을 잡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현재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라고 인식하는 순간 바로 과거의 마음으로 흘러가버리므로 현재의 마음도 잡기란 불가능하다. 또 미래의 마음이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자기 마음이라 할 수도 없다.

 

꿈속에 몇 십 년을 살고서 깨어보니 한순간 일장춘몽이더라는 말이 있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모두 꿈이요 환화(幻化)와 같은 것이며, 그 속에 박 서방 이 서방만 헛것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음이 지어낸 허깨비라는 뜻이다. 자성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 그러니 아무 것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마음은 흐름인데, 과거나 미래에 마음을 두어 과거 미래에 집착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과거 때문에 미래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욕심과 성냄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 욕심과 성냄이 없는 바른 행위를 하고 방금 한 바른 행위조차도 이미 사라져 잡을 수 없는 것이니(현재심 불가득) 그것을 내가 한 일이라고 집착하지 말고 지금 다시 정신 차려 새로 나타난 현재에 최선을 다 하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지 결코 고정불변한 마음을 상정하지 않는다. 고정불변한 마음이란 불교에는 없다. 마음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연이생(緣而生, 조건발생, 연기)일 뿐이다. 마음이 무상이요 찰나 생멸하는 흐름이며 연이생이라 한다고 해서 결코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고정불변한 마음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행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흐름변화무상성(無常性)찰나성을 제거해버리는 수행이 다름 아닌 사마타(Samatha)수행 혹은 삼매(三昧)수행이다.

 

그리고 마음은 오직 하나뿐이다.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구극의 단위로서 하나뿐이란 말이다. 그러나 찰나생 찰나멸 하면서 불가설 불가설전(不可說不可說轉)의 수많은 태어남과 사라짐을 거듭하는데, 그런 생과 멸은 마음이 일어나는 장소, 관련된 대상과 조건에 따라서 마음의 종류를 분류하는데, 이렇게 분류해서 89가지니, 121가지니 한다. 하지만 구극의 단위로서는 하나이다.

 

그리고 마음은 반드시 대상(對相)이 있다. 대상이 없는 마음은 일어나지 못한다. , 마음은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난다[소연연(所緣緣)]. 그래서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눈과 현상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난다.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난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마음()은 크게 여섯 가지로 일어난다.

 

형상(혹은 색깔)이 대상이 될 때는 눈의 알음알이[안식(眼識)], 소리가 대상이 될 때는 귀의 알음알이[이식(耳識)], ~같이 하여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마노)의 알음알이[의식(意識)]가 일어난다.

 

그리고 유식에서 설하는 모든 식, 즉 아뢰야식, 말나식, 6, 전오식은 모두 찰나생 찰나멸 하는 마음이다. 식전변(識轉變)이야말로 찰나생 찰나멸이라는 것이다.

 

이상을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마음 혹은 알음알이는 조건발생이다. 감각장소와 대상이라는 조건이 없이 혼자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마음은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

 

둘째,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유식의 아뢰야식도 반드시 종근기(種根器)라는 대상을 가진다.

 

종근기(種根器)---8 아뢰야식이 대상으로 반연하는 자기의 제8식 안에 있는 종자(種子)5()과 기계(器界)를 말한다.

 

셋째, 마음은 단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절대로 안 된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즉시 외도의 자아이론(自我理論)이나 개아이론(個我理論)이나 영혼이론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금강경>에 나타나는 산냐(sañña-)의 이론이다. 이것은 우리 불교가 가장 유념하면서 고뇌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넷째, 마음은 무상하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것(무아)이다. 특히 알음알이를 위시한 오온의 무상이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 투철하고 사무쳐야 염오-이욕-소멸혹은 염오-이욕-해탈-해탈지가 일어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해탈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결코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 오온을 절대화해버리면 그것은 유신견(有身見)이고, 이것은 중생을 중생으로 얽어매는 열 가지 족쇄가운데 첫 번째로, 이러한 유신견이 있는 한 그는 성자의 초보단계인 예류자도 되지 못한다.

 

다섯째,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이다. 찰나의 규명은 주석서 문헌을 통해서 이루어낸 아비담마 불교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을 위시한 법들은 찰나생 찰나멸하는 일어나고 사라짐(기멸)의 문제이지 있다없다(유무)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주석서는 더 나아가서 이 찰나도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 세 아찰나(亞刹那, sub-khana, sub-moment)로 구성된다고 설명함으로써 자칫 빠질지도 모르는 찰나의 실재성마저 거부하고 있다.

 

여섯 째, 마음은 흐름(상속, santati)이다. 마음이 찰나생 찰나멸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돼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는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이니 바왕가의 흐름((bhavan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세 가지 생각을 못한다. 그 대신 한 가지 생각은 다음 한 가지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 연속하는 마음 활동에서 뒷생각은 앞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은 연속하는 인과관계에서 단절이 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현상을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마음의 활동에서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조건으로서, 이미 발생한 결과가 곧 바로 다음 순간의 결과를 낳도록 돕는 연()이 된다.

 

불교의 찰나생멸(刹那生滅) 법칙에 의하면, 앞선 순간의 심적 활동은 그 다음 순간의 심적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므로, 자신의 생각이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앞생각과 뒷생각이 인()과 연()이 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앞생각이 없어지면서 뒷생각을 발생시키므로 뒷생각의 뿌리가 앞생각이 된다. 원래 마음은 전념(前念) 단계서 후념(後念) 단계로 넘어갈 때, 앞생각이 엷어져 길을 열어줘야 뒷생각이 일어난다. 불교에서는 이 두 마음이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하지 않으므로, 마치 두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널 적과 같이, 전념(前念)이 식멸(識滅)해서 그 위치를 열어주지 않으면 후념(後念)이생기지 못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출처 http://blog.daum.net/511-33/12370167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