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스크랩] 규정이 사람들을 모질게 한다

별꽃바람 2005. 5. 30. 18:20

규정이 사람을 모질게 한다.


오늘 아침 제가 만든 모임의 회원님과 우리가 지원하는 4가정 중 두 번째 가정에 다녀왔습니다. 뭐 특별히 가진 것도 없고 해서 애들 간식으로 먹을 약간의 음식을 싸들고 다녀왔습니다. 이럴 때는 제가 부자가 아닌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방학동 지하방에 사시는 할머니 가정이었는데 서류상에는 소년소녀 가정으로 되어 있더군요. 사정은 둘째 아들 내외가 손자, 손녀만을 두고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큰아들이 조카들을 키울 능력이 없다고 보육원에 맡기자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할머니 입장에서 인정상 그럴 수는 없어 혼자서 키우고 계시는데 76살의 연세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이 쉽지 않은 듯해 보였습니다.


다행히 중2 남자아이와 초등학교 6학년 여자인데 둘 다 착하게 잘 자라고 있답니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서고 여러 가지 돈이 필요한 나이인데 충분히 뒷바라지를 못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하십니다. 생계는 소년소녀가장에게 나오는 약간의 보조금과 노구를 이끌고 종이를 줍거나 취로사업에 참여하여 받은 돈으로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관절염이 심하신데 최근에는 큰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영세민 대상에서 제외를 하는 통에 일반의료 보험대상이 되어 병원치료비가 너무 많이 드신다고 걱정을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조카들은 그렇다고 해도 부모의 기본 생활비와 병원치료비는 자식이 부담하는 것이 당연한데 조카들을 이유로 방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규정상 자식이 있으면 영세민 혜택을 받을 수 없는데 그렇다고 부양비를 주지 않는다고 동사무소 직원의 말처럼 부모가 자식을 고발할 수도 없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할머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뾰족한 대책이 없더군요. 규정상으로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면 대신 기초생활비용을 지불하고 자식에게 청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위 할머니의 경우처럼 그렇게 되려면 부모가 자식을 고발해야 하는데 그게 규정상으로나 가능한 일이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입장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할머님 말씀을 듣다보니 규정이 사람을 모질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게다가 요즘에는 결혼을 하는 것조차 번거롭다면 홀로 사는 즐거움에 빠져 보려는 세태이다 보니 인구는 줄고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져 가는 듯합니다.


물론 규정상 위와 같은 경우에 정부에서 지원을 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연세가 많다는 이유로 취로사업에도 참여를 꺼려하는 공무원들과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영세민 의료 보험대상에서 제외하는 공무원 모두 규정에 충실한 훌륭한 공무원임에는 맞습니다.


하지만 규정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규정대로 따지면 할머니가 작은 아들 아들딸을 혼자서 키울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막말로 나 몰라라 할 경우에는 정부에서 두 아이의 부양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사회적 비용은 훨씬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련 규정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머님 말씀처럼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손자들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므로 두 어린 학생들은 앞으로도 할머니의 따듯한 손길 속에서 바르게 자랄 것입니다. 세상은 규정보다는 인정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37동기
글쓴이 : 송봉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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