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이향봉스님의 '여래사지에 대하여'

별꽃바람 2013. 8. 1. 20:04

이향봉스님의 글 중에서 옮겨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여래사지((如來四智)에 대하여

 

   

해제일이 지나자 스님 몇이서 찾아왔다. 이들은 학문수행과 심성수행으로 기본이 튼튼히 다져진 종단의 희망으로 보이는 스님들 이었다.

그들 중 한 스님이 내게 물었다.

 

“여래사지(如來四智)에 대한 스님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하여 내가 말하였다.

 

“대원경지(大圓鏡智)와 평등성지(平等性智) 그리고 묘관찰지(妙觀察智)에 대해선 묻지 않겠습니다.

 

스님들 중 누구라도 좋으니 성소작지(成所作智)에 대해 간단하게 무엇이 성(成)이고 무엇이 작(作)인지 먼저 설명해 보시지요.”

 

대중이 쉽게 답을 못하자 내가 말하였다.

 

“불교의 핵심사상은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입니다. 종단의 한 원로스님께서 자주 중도사상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반쪽 설명에 그치고 있으며 일생을 수행해 오신 어느 수좌스님도 연기법칙(緣起法則)을 이해하는데 있어 연기(緣起)와 무아(無我)를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기와 무아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연기(緣起)는 존재론적 실상의 우주법계를 원인과 결과로 실체를 밝힌 것이며 중도(中道)는 삶의 본질에 있어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여 실현시키는 시간과 공간의 주인공임을 일깨워주는 존재의 덕목을 중(中)과 정(正)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여래의 사지(四智)를 설명하자면 중도(中道)의 정의에 대해 간단한 언급이 필요합니다.

 

중(中)은 정(正)인데 중(中)에서는 대(對)와 변(邊)에서 정(正)에서는 미(迷)와 사(邪)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머묾 없이 자유로워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中道)는 유교의 중용(中庸)과 달라 양변불락(兩邊不落)이 아닌 양변무애(兩邊無碍)이며 무변중심(無邊中心)인 것입니다.

 

임제의 수처작주(隨處作主) 또한 중도를 드러낸 말입니다.

 

불교의 중도에는 대(對)와 변(邊) 미(迷)와 사(邪)가 없는 것입니다. 중도를 바로 알고 바로 실천하면 누구나 행복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연기법칙의 원리는 원인이 없는 결과 없고 결과에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어 돌연변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주인 브라흐만(Brahman)을 인정할 수 없듯 아트만(Atman) 존재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와 무아를 둘로 나누어 설명함은 연기의 참뜻을 사무치게 녹이지 못한 탓입니다.

 

이쯤해서 질문하신 여래사지(如來四智)를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여래에겐 사지(四智)도 군더더기 사족(蛇足) 일터이나 중생을 위해 마지못해 부쳐진 이름일 터입니다. 부처(如來)가 되면 네 가지 지혜(四智)가 나타나는데

 

첫째가 대원경지(大圓鏡智)입니다.

 

모든 인연과 경계가 끝이 없으나 묘법정안(妙法正眼)으로 친소(親疎)가 둘이 아니요. 피아(彼我)의 구분 없이 만 가지 덕의 근본으로 중생을 대하는 지혜입니다. 모서리와 변두리가 없어 우주공간 그대로가 틀이 없는 맑은 거울과 같아 부쳐진 이름입니다.

 

둘째는 평등성지(平等性智)입니다.

 

사(邪)가 낄 수 없는 우월과 열등의 높낮음 없이 유(有)와 무(無)의 차별과 집착도 없이 범성(凡聖)이 둘이 아니요 거래(去來)와 생멸(生滅) 단상(斷常) 등이 둘이 아닌 하나로 어우러진 세계입니다. 이는 팔불중도(八不中道)의 평등성을 강조해 부쳐진 이름입니다.

 

셋째는 묘관찰지(妙觀察智)입니다.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서 벗어나 온갖 미(迷)와 의(疑)에서 자유롭습니다. 진공(眞空)이나 묘유(妙有) 인 것이 묘관찰지(妙觀察智)입니다.

 

네 번째는 성소작지(成所作智)입니다.

 

수행의 목적은 성불(成佛)에 있고 성불(成佛)의 완성은 중생구제의 실천에 있습니다.

 

중생들을 대함에 있어 무연대비(無緣大悲)의 실천으로 중생을 위해 중생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것이 작(作)이요. 중생의 소원하는 일이 성취될 수 있도록 다함이 없는 보시를 실천하는 것이 성(成)입니다.

 

종교의 존재 이유, 수행과 삶의 최고 목표가 행복과 자유이듯 성소작지(成所作智)는 여래가 된 후 중생을 위한 행동의 실천으로써 회향하고 있음을 잊지 말일 입니다.

 

덧이어 설명할게 있는데 열반의 사덕(四德)인 상(常) 락(樂) 아(我) 정(淨)에 대해서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면 누리는 네 가지 덕목인데 열반경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첫째는 상(常)으로  

열반을 이루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제행유상(諸行有常)이 됩니다.

 

둘째는 락(樂)으로   

일체계고(一切皆苦)가 아니라 일체계락(一切皆樂)이 됩니다.

 

셋째는 아(我) 로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제법유아(諸法有我)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정(淨)으로  

사바예토(裟婆穢土)가 청정정토(淸淨淨土)가 되는 것입니다.

 

열반의 사덕(四德)이 연기법칙의 참 실상을 살펴 참앎과 참봄을 누리는 것이라면 여래의 사지(四智)는 중도사상의 보살행 실천을 통해 정토실현을 참봄과 참앎으로 이루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住 立處皆眞)

임제선사는 어록에서 말하고있다,

"함께 도를 닦는 벗들이여,

부처로서 최고의 목표를 삼지말라,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한낱 똥단지와 같고

보살과 아라한은 죄인의 목에거는 형틀이요

이 모두가 사람을 구속하는 물건이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住 立處皆眞)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자는 것이다,

소도구로서,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곳이 곧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隨處作主라! 따를 수자에 곳 처자, 될 작자에 주인 주자, 수처작주,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늘 주인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선시입니다.

 

이 구절의 어원은 임제 선사의 어록인 <임제록>에 나옵니다.

隨處作主(수처작주)요 立處皆眞(입처개진)이라!

내가 어느 곳에 있든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어느 곳에 서 있든 그곳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

 

세상의 주인은 바로 나며, 나는 누구의 명령이나 지시에 의하여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늘 자유의지를 갖고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가의 경전에도 진정 위대한 도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라 합니다.

 

누구의 가르침이나 지시에 의해서 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의 주체가 돼서 살아야 진정 의대한 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