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다시 읽은 마하라지의 아이 엠 댓의 내용 중 인상 깊은 부분을 모은 것입니다.
내용이 좀 길어서 읽기 어려울 듯 합니다.
관심 있는 분만 보세요. ^.^
아이 엠 댓(I am that)
나는 의식을 비추는 순수한 자각이며 그것의 무한한 내용이다.
나는 무한한 실재다.
내가 있다는 느낌, 잠을 자고 있을 때나 기절했을 때도 어떤 종자 의식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대의 모든 문제는 몸의 문제다. 내가 있다는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자신에게 묻거나 아니면 그저 그것을 고요히 지켜보십시오. 몸, 느낌, 생각, 관념, 소유물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그것을 자신으로 착각합니다. 그대는 지각할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깨달은 이의 삶은 보통사람과 똑 같이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다만 깨달은 이는 초연하고 그래서 지나가는 연극을 하나의 지나가는 연극으로 볼 뿐이지만, 보통 사람은 사물들에 집착하고 그것과 함께 움직입니다. 몸에 대한 이 집착이 사라지고 나면 자연히 그리고 애씀 없이 그대의 본래적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는 항상 지금, 곧 현재에 있기 때문에 실재하며, 지금 나와 함께 하는 것은 나의 실재성을 공유합니다. 과거는 기억 속에 있고 미래는 상상 속에 있습니다. 시간, 공간, 인과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가라앉는 정신적인 범주들입니다. 존재하는 어떤 사물도 특정한 원인을 갖지 않습니다.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그 그물을 넘어가야 합니다. 살펴보기만 해도 그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축복은 내면에서 옵니다. 내면으로 향하십시오. 명상의 목적은 생명과 의식의 근원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성실함이 성공의 유일한 조건이다.
순수한 존재 안에서 의식이 일어나며, 의식 안에서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내 것입니다. 시간에 속박된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아무런 실제성이 없습니다. 세계는 지속되지만 한 순간 동안입니다. 그대의 기억이 그대로 하여금 세계가 지속된다고 생각하게끔 만듭니다.
진아는 마음을 넘어서 있다. 돌아다니는 것은 마음의 본성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외의 모든 생각을 거부하십시오. 처음에는 마음이 반발하겠지요.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해 나가면 마음이 항복하고 침묵을 지킵니다. 일단 그대가 침묵하면, 그대가 관여하지 않아도 일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 안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대의 마음을 요동하게 하는 모든 것에서 초연하십시오. 마음의 평안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포기하십시오.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에 노예가 되면서 어지럽힙니다. 무의식적 기억이 그대가 그토록 친숙하게 살고 있는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발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대는 본래의 그대이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만일 저를 믿는다면, 그대는 의식을 비추는 순수한 자각이며 그것의 무한한 내용이라고 제가 말할 때 믿으십시오. 이것을 깨닫고 그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만일 저를 믿지 않는다면, 내면으로 들어가서 ‘나는 무엇인가?’를 탐구하거나, 아니면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인 ‘내가 있다’에 그대의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그대가 아닌 모든 것을 발견하십시오. 몸, 감정, 생각, 관념, 시간, 공간, 존재와 비존재, 이것이나 저것 등, 그대가 지적할 수 있는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어떤 것도 그대가 아닙니다. 세계는 저의 상상이 반영된 것일 뿐입니다. 세계는 저의 안에 있고, 세계가 저 자신입니다.
자각은 원초적입니다. 그것은 원래의 상태이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원인도 없고, 지지물도 없고, 부분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자각 없이는 어떤 의식도 있을 수 없지만 의식 없이도 자각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각이기 때문에 모든 의식의 상태 안에는 자각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지의 상대 물일뿐입니다.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진아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무지이며 슬픔의 원인입니다. 진아가 유일한 실재이고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찰나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자유이고 평안이고 기쁨입니다. 사물들을 상상한 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우십시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자기 자신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대에게 비쳐주는 바로 그 거울이 그대 자신의 얼굴도 그대에게 비쳐 줄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거울을 닦는 천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한 늙음 안에 영원히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의 과정만이 연속됩니다. 어떤 것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자각은 시간에 속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의식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사람이란 단지 실재의 한 그림자일 뿐 실재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초조해 하거나 근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 원인이고, 독립적이며, 그 자체로 완전하고, 시간과 공간, 마음과 물질을 넘어서 있습니다. 모든 이름과 형상을 놓아 버렸을 때 실재가 그대와 함께 있습니다. 실재는 하나입니다. 자신의 의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삼매입니다. 최고의 견지에서 보자면 세계에는 아무 원인이 없습니다.
인과성에 대해 왜 그렇게 많이 걱정합니까? 사물들 자체가 무상한데 원인들이 뭐가 중요합니까? 오는 것은 오게 내버려 두고, 가는 것은 가게 내버려두십시오. 왜 무상한 사물들을 붙들고 그것들의 원인에 대해 탐구합니까?
마음이 고요하면, 절대적으로 침묵하면, 생시의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 만약 정말 그렇게 원한다면 –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대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데 기인합니다. 그대는 일체에 두루 하고, 영원하며, 무한히 창조적인 자각, 즉 의식입니다.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아주 작은 것으로 실제로 그것은 하나의 복합체이고, 그 자체로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그림자, 기억들의 합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위들도 의식하고 살아 있습니다. 기억에 기초한 상상(곧 과거)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갈망하는 상태는 더 깊은 모든 체험을 가로막습니다. 무욕이 최상의 지복입니다. 경전만 아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대 자신의 진아가 그대의 궁극적인 스승입니다. 내면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를 발견할 것입니다. 진아지는 그대로 하여금 무엇이 그대가 아닌지를 이해하게 해 주고, 거짓된 관념, 욕망과 행위로부터 그대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거짓을 거짓으로 보는 것이 명상입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여 거짓된 것을 포기하는 수련을 의도적으로 매일 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시작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명상법이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대 자신을 ‘내가 있다’는 자각 안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하십시오. 이것은 모든 노력의 시작이며 또한 끝이기도 합니다. 항상 존재하는 자가 누군지를 발견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그대의 관념은 나날이 변하고 순간순간 변합니다. 그대의 자기상은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그것은 취약하며, 그대 주변인에 의해 좌지우지 됩니다. 가족을 잃거나, 직업을 잃거나, 모욕을 당하면, 심지어 주식의 변동에도 자신의 상은 깊숙이 변화합니다.
기억이 연속성의 환상을 제공하고, 반복이 인과성의 관념을 창조합니다. 무욕과 두려움 없음이 그대를 깨달음의 상태로 데려다 줍니다. 원인을 찾는 것은 마음의 공연한 심심풀이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이원성은 없습니다. 일체가 그 자신의 원인입니다. 욕망이란 마음속의 물결들일 뿐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존재하려는 욕망이 문제의 근본원인입니다.
욕망이 없는 명료함으로 그대 자신을 보십시오. 결과를 구하니까 고통스러워집니다. 구함이 없이 노력하고, 욕심 없이 분투하십시오.
그대가 어쩌다 불운하다고 할 때 어떤 성스러운 영혼이 그대에게 행운을 얻으려면 어떤 진언을 암송하라고 합니다. 이때 그것을 신심과 헌신으로 계속 암송하면 불운이 반드시 행운으로 바뀌게 됩니다. 꾸준한 신심은 운명보다 더 강합니다. 운명은 대개 우발적인 원인들의 결과이며, 따라서 느슨하게 짜여 있습니다. 확신과 좋은 희망이 있으면 그것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겉모습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이름 및 형상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저의 세계에는 영원한 침묵이 있습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모든 것이니까요. 그대의 오류는 태어났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그대는 결코 태어나지 않았고, 결코 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구원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욕망을 통해 그대는 고통과 쾌락이 있는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고통은 쾌락의 배경이며, 모든 쾌락의 추구는 고통에서 태어나고 고통 속에서 끝납니다. 자기 사랑을 진아에 대한 사랑으로 교체하십시오. 실재 안에는 가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정적으로 무욕이 되십시오.
저는 어떤 차별상도 없는 곳, 사물이 없고 마음이 사물을 창조하지도 않는 그런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억과 기대에서 벗어나 있기에 저는 싱그럽고, 무구하고, 정성스럽습니다. 마음은 큰 일꾼이어서 휴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별개의 자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진아입니다.
욕망은 우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 힘은 불가사의합니다. 작은 성냥개비 하나가 거대한 숲을 태울 수 있듯이, 하나의 욕망이 현상계의 불길을 일으킵니다. 물은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무런 형상도 이름도 없습니다. 이름과 형상에 대한 집착이 두려움을 낳습니다. 어떤 것도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마십시오. 별개의 나라는 관념을 내 버리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하나가 되고 그 하나가 그대가 되어 저와 별개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한 송이 꽃이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합니까? 꽃은 그 성품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함이지, 완전해지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의식이 있었습니다. 의식 안에서 세계가 생겨나고 의식 안에서 그것이 지속되며, 순수한 의식 속으로 그것이 해소됩니다. 만물의 뿌리에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무리 진보한 수행자라 할지라도 겸손과 침묵이 필수적입니다.
어떤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깨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관점 자체가 바뀝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요기가 되고,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지 수행자가 되며, 행복을 추구하는 자는 활동가가 됩니다.
모든 구분은 마음 안에 있지 실재 안에는 어떤 구분도 없습니다. 확신은 마음의 한 상태에 불과합니다. 그것 안에는 ‘내가 있다’가 없습니다. 진아의 느낌과 더불어 지복이 나옵니다.
모든 고통은 욕망에서 나온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힘이 없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무엇이라고 여기고, 자신이 무엇을 안다, 무엇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미혹시키는 한, 우리는 실로 딱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존재를 발견할 기회는 완전한 자기 부정 속에만 있습니다. 몸-마음이 자기 자신이라는 환상이 버려지고 나면 죽음은 그 공포의 힘을 상실하고 삶의 일부가 됩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저 자신을 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저와 다른 사람들 간에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그러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즉, 나눌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실재의 덩어리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으면 다른 어떤 변화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을 맑게 하고, 그대의 가슴을 깨끗이 하며, 그대의 삶을 성스럽게 하십시오. 그것이 그대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마음은 상태들의 집합에 불과하므로 실재하지 않고, 그 각각의 상태는 찰나적입니다. 찰나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어떻게 실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수행이란 자신이 순수한 ‘존재함’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강제적으로 상기시키는 과정입니다. 진아, 즉 모든 이의 유일한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는 이름과 형상, 마음과 몸들의 다양성에 미혹되어 다수의 자아들을 상상합니다. 개인적인 자아와 보편적인 자아라는 이야기는 배우는 이의 단계입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이원성에 걸리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아는 순간, 그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자유와 쉼을 줍니다. 세상 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대가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주가 그대 자신의 것이며, 그것이 그대의 몸이 되고, 표현이 되고, 도구가 됩니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그 행복은 형언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는 진정으로 죽을 수 없습니다. 집착이 속박이고 무집착이 자유입니다. 갈망하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죽고, 모든 것이 됩니다. 아무것도 원치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 그것이 진짜 창조지요. 자신의 심장 안에서 우주가 일어나고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삶을 이리저리 몰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삶과 함께 흐르면서 현재 순간에 해야 할 일에 스스로를 완전히 맡겨버리십시오. 사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죽음 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겁내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미루지 마십시오. 본래의 그대가 되십시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믿고 한번 해 보십시오. 정직하게 경험하십시오. 그대의 진정한 존재에게 그대의 삶을 형성할 기회를 주어 보십시오.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은 평안 같은 것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요동하는 것은 평안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번뇌를 뜻합니다. 요동치는 것 자체가 마음입니다. 마음은 생각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진아를 발견하려는 욕망은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다만 그대가 다른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면 말입니다. 욕망과 두려움의 뿌리는 기억에서 생겨난 기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남에게 줄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도움은 그 사람이 더 이상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게 해 주는 것입니다.
쾌락 안에서 위안을 구하는 이유는 고통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깨어나라, 그대 자신을 알라. 그대 자신이 되라.’가 전부입니다. 모든 문제는 자신이 태어나고 죽는다고 믿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미망에서 깨어나 자유로워지십시오. 그대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최고의 스승은 그대 내면의 진아입니다. 탄생과 죽음은 관념에 불과하다. 탄생이란 ‘나는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이며, 죽음이란 ‘나는 내 몸을 잃어버렸다’는 관념일 뿐이다. 깨달은 사람에게 마음-몸은 하나의 방과 같다. 방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안에 살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마음은 배우이면서 무대입니다. 만물은 마음에 속하지만 그대는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이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지, 그대가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 자신을 세계와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고통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의 주시자가 무수한 몸들 안에서 ‘내가 있다’로서 반사됩니다. 삶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도처에 잔인함이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고 사니까요. 동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살해당하는 것은 죽는 방식 중에서 최악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것은 병으로 죽거나 늙어서 힘이 없어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살해는 피살자가 아니라 살해자를 상하게 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저의 안에 있습니다. 실재는 묘사할 수 없고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대는 순간적인 통찰을 원하는 것 같은데, 그 순간이 있으려면 항상 오랜 준비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열매는 갑자기 떨어지지만 그것이 익으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외부적인 것에 몰두하기 때문에 그대가 내면적인 것에 집중하지 못할 뿐, 그 외에는 그대를 막는 것은 없습니다.
그대의 마음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으면 이원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느낌조차도 순수한 빛과 존재의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세계의 빛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대는 또한 자신이 그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고 가는 것은 존재성이 없습니다. 시작 없는 것에는 원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아의 성풍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들이 그대 자신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정보와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진정한 스승이 아닙니다. 진정한 스승은 실재를 아는 자로서, 겉모습들의 화려함을 넘어서 있습니다.
몸과 자아 간에 아무것도 개입해 있지 않은 아기같이 되십시오. 아기는 정신적인 삶의 끊임없는 소음이 없고, 깊은 침묵 속에서 자아가 몸을 관조합니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와 같습니다. 이것이나 저것이 되려 하지 말고 저 아기같이 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행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마음 챙김, 자기 자신, 마음에 대한 완전한 자각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다위에 있는 파도들에 불과합니다. 분별은 마음이 만들어 내고, 마음에게만 해당됩니다. 저는 그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의식의 저 무한한 바다입니다.
빛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어둠을 소멸하듯이, 절대자도 상상을 소멸합니다. 영구적으로 별개인 사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아십시오. ‘내가 있다’가 아직 ‘이것이 나다’나 ‘저것이 나다’로 오염되기 전의 순수한 상태로 있는, 그 순수한 존재의 상태로 돌아가십시오.
그대는 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며, 늘 행복과 평안을 구합니다. 그대가 행복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그대를 비참하게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까? 생각하는 것을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 생각들에 관심을 갖지 만 마십시오. 무관심이 해탈을 가져다줍니다.
세계는 그대가 만드는 것이니만큼, 얼마든지 그것을 행복하게 만드십시오. 만족할 줄 알아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지복입니다. 그대는 몸도 아니고 몸 안에 있지도 않습니다. 몸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넘어서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은 시간 안에 있는 점들일 뿐입니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은 더 큰 것을 얻는 것입니다. 일체를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일체를 얻습니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전부입니다. 꿈속에서 그대는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지만, 깨어나면 자신이 모든 것을 감싸는 사랑 자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삶은 지금일 뿐입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그대의 마음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마음의 모든 내용, 모든 상상과 노력을 지워 버리십시오. 그러면 장애들이 없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실재가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나’라고 불리는 기억과 희망의 다발이 그 자신을 영구히 존재한다고 상상하면서, 자산의 거짓된 영원성이 거주할 수 있는 시간을 창조합니다. 제가 세계와 하나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저는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고통은 물리적이며 괴로움은 정신적입니다. 마음을 넘어선 곳에는 아무 괴로움이 없습니다. 고통은 그 육신이 위험에 처해 있으며 거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하나의 신호에 불과합니다.
그대가 가진 유일한 단서, 곧 그대가 존재한다는 그 확실한 느낌을 의식의 초점 안에 꾸준히 유지하십시오. 몸이 있고 진아가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마음이 있는데, 그 안에서 진아가 ‘내가 있다’로서 반사됩니다. 마음은 그 불완전함, 조야함과 들뜸, 분별력과 통찰력의 부족 때문에, 그 자신을 진아가 아니라 몸이라고 여깁니다. 마음을 정화하여 그것이 자신과 진아의 동일성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한 전부입니다.
그 자체로 선하고 악한 일들이라는 이런 문제는 저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좋고 불필요한 것은 나쁩니다. 그대의 세계에서는 즐거운 것은 좋고 고통스러운 것은 나쁘겠지만 말입니다.
그대가 지각하는 세계는 의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소위 물질이란 것은 의식 그 자체입니다. 그대가 바로 그 물질이 움직이는 공간이고,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이며, 그것에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상상과 집착을 끊어버리십시오.
마음이 어떤 것에 열렬히 관심을 가지면 그 관심의 대상과 하나가 됩니다. 몸과 별개로는 ‘나’도 없고 세계도 없습니다. 그 셋은 함께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마음 안에 하나의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면, 마음은 공상에 빠져 그 자신이 삶을 지배하고 제어한다고 상상합니다. 그대들이 사건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 해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행위자라는 관념, 하나의 원인이라는 관념 자체가 속박입니다.
저는 모든 여가 시간을 침묵 속에서 저 자신을 바라보는 데 소비했습니다. 본래의 그대는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 두려움이 사라지면 모든 괴로움이 끝납니다.
마음이 그 몰두하는 대상으로부터 계속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고요해집니다. 만약 이 고요함을 어지럽히지 않고 그 안에 머무르면 그대는 그것이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빛과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즉시 그대 자신의 성품으로 인지합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그것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마음을 늘 분주하게 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멈추십시오. 그리고 그냥 존재하십시오.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쇠퇴합니다. 진리는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잇속과 자기걱정이 거짓의 초점들입니다. 그대의 일상생활은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진동합니다. 자기추구적인 동기가 보일 때마다 즉시 내버리십시오. 그러면 따로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가 그대를 발견할 테니까요.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은 하나의 환상이며 장애입니다. 마음이 있다고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모든 생각은 이원성 안에 있습니다. 단일성 안에서는 어떤 생각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려야 합니다. 신은 모든 욕망과 지식의 끝입니다. 자유는 포기를 통해서 옵니다. 모든 소유는 속박입니다.
욕망이나 두려움이 무엇이든,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란 것은 어떤 오해의 결과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감정, 사고, 행위들이 끝없이 이어져 주시자 앞을 달려가면서, 두뇌 안에 흔적을 남겨 연속성의 환상을 창조합니다.
꽃은 향기로 허공을 채우고 촛불은 빛으로 허공을 채웁니다. 그것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생각들이 그대를 지배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한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독입니다. 진정한 포기는 포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그대는 자격이 있을 뿐 아니라 그대가 바로 진리 자체입니다. 다만 그대가 거짓을 참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는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 자격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의 것입니다. 달아나거나 쫓아가는 것만 그만두십시오. 가만히 서서 침묵을 지키십시오.
그대의 참된 존재는 전적으로 無 자기의식적이며, 그 몸이 거칠든 미세하든 초월적이든, 어떤 몸과의 자기 동일시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존재하려면, 그대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대 자신을 어떤 것,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고 지옥입니다.
자기가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은 죽음을 아주 겁냅니다. 반면에, 자신을 참으로 아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하나의 행복한 사건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이기적인 고립에서, 편협함과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인류의 고통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그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도움의 수단, 곧 그대 자신을 완전하게 하십시오.
순수한 의식의 빛 안에는 아무것도, 심지어 아무것도 없다는 관념조차도 없고 오직 빛만 있습니다. 일단 아무것도 갖지 않게 되면 그대에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대의 것이 아니라는 것, 일체가 모두에게 속한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대의 몸 자체도 전 우주가 그것의 창조와 존속에 기여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몸이 죽으면 그대가 지금 살고 있는 삶 –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사건들의 연속 - 은 끝이 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도 끝날 수 있습니다. 그 몸의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말입니다. 주의를 진아로 옮겨서 그것을 거기에 붙들어 두면 됩니다.
기억들의 집착에 의해 한데 합쳐진 다발이 바로 그대라는 것을 알았으면, 거기서 벗어나 바깥에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기억 아닌 어떤 것을 처음으로 지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이지 그대는 지고의 실재이다. 내말을 의심하지 말고, 나를 불신하지 말라.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행동하라.
스승님이 저에게 ‘그대가 지고의 실재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부터 저는 환영과 무아경을 더 이상 경험하지 않게 되면서 아주 고요하고 단순해졌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점점 더 적게 욕망하고 적게 하는 것을 발견했고, 마침내 너무나 놀라워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름과 형상들은 의식의 바다 위에 있는 찰나적인 파도들에 불과합니다. 알려지는 것은 ‘나’이거나 ‘내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면 해탈로서 족합니다.
실재를 보는 것은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큼이나 단순합니다. 다만 그 거울이 맑고 오염되어 있지 않아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입니다. 원인들은 무수합니다. 하나의 단일한 원인이 있다는 관념은 환상입니다.
자신이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것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우주는 행위로 가득 차 있지만, 행위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침묵을 지키십시오. 세상에서 그대의 일을 하되, 내면적으로는 침묵을 지키십시오. 깨달음을 위해 그대의 일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희망은 그대의 마음 안에서 고요함을 유지하고, 그대의 심장 안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아주 고요합니다.
의식하는 자아로서 그대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각으로서, 그대는 자연을 넘어서 있습니다. 자연을 의식으로만 보는 것이 자각입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봄이 있을 때만 나타납니다. 그 둘은 봄의 속성들입니다.
물질과 마음은 별개가 아니라 한 에너지의 두 측면입니다. 마음을 물질의 한 기능으로 보면 그대가 과학을 갖고, 물질을 마음의 산물로 보면 종교를 갖게 됩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대이지 시간이 아닙니다. 움직임을 멈추십시오. 그러면 시간도 그칠 것입니다. 물러남, 초연함, 놓아버림이 죽음입니다.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수적입니다. 모든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모든 구별과 반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모든 순간은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깨달음이란 그 근원을 발견하여 거기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멈추고, 바라보고, 이해하고, 기억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이 상상을 먹여 살리고, 상상이 욕망과 두려움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지혜를 즐기기 위해서 – 늘 그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삶은 살아내야 하는 하나의 과업이기를 그치고 자연스럽고 단순한 것이 되어, 그 자체 하나의 황홀경이 됩니다. 몸은 마음에 의존하고, 마음은 의식에, 그리고 의식은 자각에 의존하고 있다.
말을 넘어가려는 그런 거듭된 시도가 이른바 명상입니다. 수행이란 언어적인 것에서 비언어적인 것으로 넘어가려는 끈질긴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대는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대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그 주시자도 아니며 그것들을 완전히 넘어서 있다는 관념을 고수하면, 그대의 마음은 명료함 속에서 성장하고, 그대의 욕망은 순수함 속에서, 그대의 행위들은 자비 속에서 성장할 것이며, 그 내적인 정수가 그대를 어떤 다른 세계로, 진리와 두려움이 없는 사랑의 세계로 데려갈 것입니다. 내가 있다 너머에는 빛과 사랑의 무한한 세계가 있습니다.
세상은 공포와 갈망 사이에 짓눌려 있는 중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대의 행복은 상황과 환경에 달려 있고,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이며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면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대는 의식과 생명을 넘어서 있고, 신을 넘어서 있으며,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 있습니다. 모든 것이면서 모든 것을 넘어서 있는 그대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기억에 기초한 마음 때문입니다. 마음과 투쟁하지 말고 그냥 그것을 무시하십시오.
‘나는 몸이다’하는 관념을 넘어가십시오. 그러면 공간과 시간이 그대의 안에 있지, 그대가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몸뚱이가 있고 그 몸뚱이가 자기라는 느낌이 있는 한 좌절은 불가피합니다.
자유란 걱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결과에 대해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그대의 욕망과 두려움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냥 오고 가게 내버려두십시오. 그것들에게 관심과 주의라는 자양분을 주지 마십시오. 생명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으면서 움직이고, 찰나적이면서도 지속됩니다.
진정한 수행은 애씀이 없는 것입니다. 살려는 욕망 자체가 죽음의 전령입니다. 행복해지려는 소망이 슬픔의 윤곽이듯이 말입니다. 세계는 고통과 두려움, 걱정과 절망의 바다입니다.
각각의 사물이 모든 사물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우주 안에서 하나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 자신을 변화시키면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대에게 문제를 안겨주는 것은, 그대가 자신의 상상과 욕망 때문에 얻으려고 분투하는 것들뿐입니다. 삶을 오는 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하나의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시도를 버리고 그냥 존재하십시오. 애쓰지 말고, 분투하지 말고, 모든 지지물을 놓아 버린 채 맹목적인 존재의 느낌을 착파하면서 나머지 일체를 털어버리십시오. 주의를 주지 말고 사물들이 오든 가든 내버려두십시오. 욕망과 생각들도 사물입니다. 무시해 버리십시오. 무욕, 무집착,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자기걱정으로부터의 자유, 기억과 기대에서 벗어난 단순한 자각, 결국 해탈이란 발견할 자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나’가 해체되면 개인적인 고통도 사라집니다. 어리석음과 이기심이 유일한 악입니다.
삶이 안겨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쾌활하게 맞이하는 것이 그대에게 필요한 고행의 전부입니다. 그대는 늘 그대 자신의 진아와 함께 벗하고 있습니다. 외롭다고 느낄 필요가 없지요. 그대 자신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는 진인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자체가 창조주입니다. 그대가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모든 공간과 시간은 마음 안에 있습니다.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그대는 세계 안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기앎(self-knowledge)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기록된 종교들은 군더더기, 말의 무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를 알려거든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지켜보십시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봉사하는 것이 그들의 종교입니다.
사람들 간의 진정한 의사소통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는 영원한 법칙입니다. 내면을 바라보고, 내면을 탐색하십시오. 진아지를 가로막는 것은 그대의 마음일 뿐입니다.
그대는 그 몸이 아니고, 그것의 욕망과 두려움도 아니며, 환상적인 관념들을 가지고 있는 그 마음도 아니고, 사회가 그대에게 담당하기를 강요하는 역할, 즉 아무개는 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기대되는 그 사람도 아니라는 것은 그대가 가진 믿음과 이성이 다 말해 줍니다. 거짓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실이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대가 곧 그대 자신입니다.
그대는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바로 삶 자체이니까요. 그대가 순수한 자각의 기술을 통달하고 나면 그것은 쉽게 건널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가 첫 단계입니다. ‘일체가 나다’가 그 다음이지요. 욕망하고 두려워하면서 그대의 감정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 할 때, 그대는 슬픔과 속박을 창조합니다.
몸도 마음도, 심지어 의식도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아주 깨닫고,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선 그대의 참된 성품 안에서 홀로 서십시오. 긴장을 풀고 ‘내가 있다’를 지켜보십시오. 실재는 바로 그 뒤에 있습니다. 침묵을 지키고 고요히 있으십시오. 그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그대를 끌어들이겠지요. 몸과 마음을 ‘그대가 아닌 것’으로 올바르게 보십시오. 그뿐입니다.
그대 자신을 개혁하려 들지 말고, 그저 모든 변화가 부질없다는 것을 아십시오. 마음 이전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마음속의 한 생각이 아닙니다. 마음은 나에게 일어나지만, 나는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은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고, 영원하며, 도처에 편재합니다. 세계 자체가 하나의 기적입니다. 저는 기적들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대가 아닌 것을 단호히 배격해 나가다 보면 진아가 그 찬란한 無(nothingness), 즉 ‘어떤 것도 아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명상을 하면 됩니다. 그것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그대의 문제를 완전히 자각하고, 그것을 모든 측면에서 바라보며, 그것이 그대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지켜보십시오.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내버려두십시오.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러면 단박에 그대의 시야가 맑아질 것이고, 그대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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